<시정칼럼>왜 <응답하라 1988>에 열광하는가?
<시정칼럼>왜 <응답하라 1988>에 열광하는가?
  • 시정일보
  • 승인 2016.01.14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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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섭 논설위원
   
 

[시정일보]최근 종편채널 TV를 통해서 방송된 드라마 한편이 인기를 끌면서 화제가 되었다. 바로 응답하라 시리즈가 그것이다. 그동안 연작처럼 ‘응답하라 1998’이 먼저 방영되었고, 오히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서 ‘응답하라 1988’로 서울올림픽이 있었던 그 시절 서울의 변두리 쌍문동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복고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등장하게 되었고 1970년대 유행했던 바지 단이 넓은 소위 나팔바지가 다시 유행이 될 거라는 패션계의 이야기도 들리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왜 이 드라마에 빠져드는 걸까 생각해보았다. 가장 많은 답이 ‘사람 사는 냄새’가 아닐까 싶다. 쌍문동에 사는 덕선이네와 정환이네 그리고 선우와 택이, 동룡이 다섯 친구의 각기 사정이 다른 집안 가족들과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그 시절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드라마의 특성상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몇 가지 구성상의 장치며 이야기에 복선을 깔아놓은 플롯 구조 등이 인기의 요인일 수도 있으리라.

은행에 다니면서도 친구의 빚보증을 잘못 서서 셋방살이를 하지만, 그리고 딸들에게 험한 욕을 해대는 아빠지만 아이들은 아무런 구김없이 자란다. 주인집 아들이라고 지하 셋집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는 일도 없고 오히려 친구로 서로 감싸주고 우정을 나누는가 하면 공부를 잘해서 의대에 갈 실력을 가졌거나, 학생주임의 아들이지만 공부와는 담을 쌓고 아예 대학교에 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친구들과도 서로 아무런 이해득실이나 차별 없이 우정 하나로 형제이상의 돈독한 정을 나누고 산다. 이웃의 아픔을, 이웃의 걱정거리를 함께하며 형식적인 담장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그야말로 가족 같은 사람들이 산다.

거기에는 조금의 다툼이 있을지언정 분란이나 싸움은 없고, 말대꾸 정도는 하지만 부모에게 대들고 위해를 가하는 자식들도 없으며, 입시와 오랜 시간 동안의 자율학습 등으로 다소 불만을 가지고 일탈을 꿈꾸는 귀여운 악동들은 있지만 선생님께 노골적으로 대들고, 오히려 선생님께 몽둥이를 들고 구타를 가하는 패륜적인 학생들은 없다. 또 선생님과의 면담에서도 자식의 미래를 함께 걱정하며 자식의 성적이 낮은 것을 마치 자신의 잘못인양 선생님께 머리를 조아리며 자식의 교육을 부탁하는 학부모는 있을지언정 돈 좀 있다고, 권력이 있다고 내 아이의 선생에게 대놓고 뺨을 때리거나 폭행을 휘두르는 못 되먹은 학부모도 없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은 분명히 우리가 살고 있었던 시대의 이야기다. 그렇기에 더욱 공감하면서 추억 찾기라는 재미를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재미를 느끼기보다는 보는 내내 쓴웃음이 나오는 건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너무나 변해버린 현실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무엇 하나 그 시절과 비슷함이 없다는 게 큰 놀라움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이웃과 이웃의 관계, 사제지간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 등등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요즈음의 세태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다른 장면이라는 생각이다.

수 천 년을 이어내려 온 인간사에서 불과 삼십년도 안 된 시간 만에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의 경이로움과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를 이제라도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최근 여기저기서 인문학의 열풍과 인간성회복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하지만 과연 우리의 심성과 풍속이 과연 ‘응팔’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는 정말 그 누구도 장담하기 힘든 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앞으로 십년 정도 우리 사회와 사람들은 또 얼마나 잔혹하게 변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는 실로 소름이 돋는다. 나도 이제는 간곡하게 소리쳐 보고 싶다. “응답하라 응답하라 제발 응답하라”고..... 동대문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