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독립운동가 채응언(蔡應彦) 선생(1879 ~ 1915. 11. 4)
7월의 독립운동가 채응언(蔡應彦) 선생(1879 ~ 1915. 11. 4)
  • 시정일보
  • 승인 2005.07.06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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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는데 강도란 당치도 않다”
채응언 선생이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국가보훈처는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한 채응언 선생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선생은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군대가 해산되어 민족 무력이 말살됨에 통분하여 의병부대에 투신 처음 이진룡 의병부대의 부장으로 활동하면서 평안도·황해도·강원도 일대의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활발한 유격전을 펼쳤다.

1908년 황해도 안평(安平)순사주재소, 수안(遂安)헌병분견소를 공격하여 일본헌병을 처단하고, 함경남도 마전동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다량의 무기를 노획하여 군비를 갖추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도 선생은 의병부대 해산을 거부하고 김진묵 의병부대의 부장으로, 또는 단독으로 3,4백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경기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 일대의 산악지대를 넘나들며 신출귀몰하게 일본군수비대와 헌병을 공격했다. 1913년에는 황해도 대동리헌병분견소, 선암헌병분견소를 기습하여 일본군 다수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나아가 1915년에는 향리인 평남 성천군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두고 유격전을 전개 일본군경은 물론 친일 밀정 등의 부일배를 처단하고 군자금을 조달했다. 이 같은 항일 무장투쟁으로 일본군경 및 부일배 20여 명이 처단되자 일제는 ‘적괴 채응언 수색대’라는 특설대를 조직하여 선생을 체포하기에 혈안이 됐다.

이런 와중에 선생은 1915년 7월 평남 성천에서 군자금을 조달하러 병졸을 이끌고 마을로 내려오던 중, 잠복한 일본군경과 맞닥뜨려 적들과 치열한 사투를 벌여 전중(田中) 상등병을 부상시키는 등 강력한 저항 중에 중과부족으로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평양헌병대로 호송 심문을 받은 뒤,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어 1915년 8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살인·강도죄’로 사형을 받았다. 이 때 선생은 최후 진술에서, “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는데 강도란 당치도 않다”고 일갈하여 굳건한 항일민족의식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