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마디/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다, 재일학도의용군
나도 한마디/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다, 재일학도의용군
  • 시정일보
  • 승인 2017.09.2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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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서울보훈청 보훈과
   
 

[시정일보]매년 9월 말 인천 수봉공원의 한 참전기념비 앞에서는, 위기에 놓인 조국에 목숨을 바치고자 멀리서 달려와 준 용사들을 기리기 위한 행사가 열린다. 

6·25전쟁을 맞이한 조국을 위해 대한해협을 건넜던 642명의 용사들에 대한 기억은, 인천의 작은 공원에 묻어두기에는 너무도 숭고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다.     

개전 한 달여 만에 국토의 팔할을 상실한 1950년 여름의 대한민국은 구국의 손길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지만, 이는 바꿔 말해서 어려웠던 전황만큼이나 참전에 따른 개인의 목숨 보전이 어려웠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참전의 뜻을 관철한 것은 일본에서 학생 신분으로 살고 있었던 교포들이었다.  

이국에서 누란지위에 처한 대한민국의 소식을 접한 이들은 재일본대한거류민단을 중심으로 의용군을 자원하여, 천여 명의 지원자 중 642명이 최종선발되었다. 9월 8일 출정식을 마친 의용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원산상륙작전, 장진호전투, 흥남철수작전, 백마고지전투, 금성전투 등 한반도 각지에서 활약했다. 재일학도의용군만으로 편성된 ‘3·1독립보병대대’가 해산된 후에도 이들은 국군과 미군에 편입해서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대한민국을 위해 싸웠다. 

나라가 위태로움을 당하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見危授命]는 말처럼, 재일학도의용군은 대한민국이 가장 위태로울 때 조국을 찾았다. 이들의 구국의지는 모든 물리적 장애는 물론 죽음에 대한 공포까지 초월하는 것이었기에, 이들의 희생에 내포된 숭고함은 그 정도가 더해질 수밖에 없다. 135명의 전사자는 물론이거니와, 전쟁의 상흔에 더해, 일본 정부의 입국 반대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의용군들이 평생 안고가야 할 희생 또한 결코 작지 않다. 

다행히 대한민국 정부는 1967년 이 분들에게 방위포장을 수여했고, 이듬해에는 국가유공자에 편입하여, 희생과 공헌에 상응하는 예우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의 헌신에 대한 보훈은 단지 국가에 의한 보상과 예우로서 끝이 아니라, 국민들의 마음 속에 자랑스러운 역사로 영원히 기억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또한 이는 나라를 지킬 가장 강력한 무기인 국민들의 ‘투철한 애국심’을 배양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