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갈등을 생산적인 경쟁으로
지역갈등을 생산적인 경쟁으로
  • 시정일보
  • 승인 2006.06.2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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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춘 기 논 설 위 원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지역갈등 이다.
이념이 남북을 갈라놓은 건 우리 민족의 역사가 만든 숙명적인 것이라지만 동서냉전의 해빙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을 타고, 남북협력이란 물꼬가 트이고 있으니 조만간 급물살을 탈수도 있어 보인다. 세월 가면 갈수록 그 갈등의 골이 깊어만 가는 동서갈등, 영호남 갈등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으니, 마치 지워지지 않는 ‘흉터’처럼, 풀어낼 길 없는 ‘한’처럼 민족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듯 하다.
영남정권·호남정권이 집권해 보았지만 물갈이 인사, 차별론, 역차별론 등 정치권의 교묘한 술수와 역이용으로 그 골이 점점 깊어만 갔을 뿐이다.
그 결과 국정은 정체성을 면치 못하고, 출신 지역 때문에 능력과는 상관없이 입신하지 못하는 현상으로, 뜻있는 사람들일 우리에게는 인재가 없다는 한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나라밖에 내 놓으면 세계 어느 민족보다 우수한 자질을 발휘하는 인재도 이 땅에 뿌리박으면 곧 쓸모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나는 경우도 있다. 한때 재외 과학· 기술인력을 불러 모았다가 국내의 열악한 ‘환경’ 때문에 만신창이로 만드는 경우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환경’이라 함은 우리의 문화수준일 수도 있고 과학· 기술적 기초일 수도 있겠지만, 지역갈등에 기초한 집단 이기주의 혹은 ‘굴러온 돌과 박힌 돌’의식이나 지연과 학맥을 따지는 뿌리 깊은 파벌의식이 자리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여러 방면에서 세계최강을 자랑하는 미국에도 지역갈등은 있다. 남북전쟁이후 조성된 남부지방과 북부지방간의 미묘한 갈등, 동부지역 사람들이 LA 등 서부지역 사람들을 카우보이라 별칭하며 퍼니(Funny)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등의 미묘한 갈등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 갈등의 골이 그리 깊지는 않으므로 국가적 병폐로 보이지는 않고 사회문제로 이슈화되지도 않는다. 복수민족국가인 까닭으로 뿌리 깊은 인종간의 갈등은 원죄의 멍에처럼 씌워져 있지만, 그것도 실용주의적 현실론으로 때론 봉합을 하고 때론 역할과 책임이라는 접점을 찾으면서 사회발전의 동인을 크게 저해하지는 않는다.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그 갈등과 대립 혹은 파벌의식은 심각하다는 말 대신에 ‘미묘’ 하다는 수식어를 붙어야 한다. 우리의 경우 제로섬의 게임하듯, 너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던가,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유혈이 낭자한 싸움’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막무가내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가 아니라는 것이다. 때가 되면 역할과 책임의 논리, 생산적인 경쟁으로 오히려 갈등의 시너지효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사회적 갈등을 대체적으로 세대간, 계층간 및 지역간 갈등으로 나눈다. 가치관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맞부딪치고, 문화가 다른 사람들일 보여서 개인적인 혹은 집단적 삶을 사는 우리 사회가 여러 모습의 갈등을 겪는다는 것도,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갈등을 화합으로 이끄는 출발점은 존재의 인식이요 인정이고 귀착점은 공유이다. 국제화, 세계화, 지구촌을 외치는 목소리가 요란해 진지 이미 오래다. 최선의 세계화는 지방화를 의미한다고도 한다. 남달리 단일민족국가를 이루고 사는 우리가 그 좁은 땅을 남북으로 다시 동서로 나누어 산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화를 지구촌 시대를 외쳐본들 어찌 힘찬 목소리를 내겠는가.
마음의 문을 열고, 이질적 문화마저도 인정하고 이해하는 가슴과 눈을 가지는 것이 지역갈등을 극복하고 더 넓은 세계화의 문을 여는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