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를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歷史를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시정일보
  • 승인 2006.07.2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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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춘 기 논설위원

- 정치하는 사람들이 흔히 국민은 수사(修辭)라 한다 -




역사를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역사로 탄생되기 전까지 어느 쪽으로 가느냐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발버둥칠 뿐이다. 그러다가 일단 역사의 흐름이 결정되면 유리하면 자기 공이고, 자기편이라고 침소봉대(針小棒大), 선전(public relation)하는 것이 대부분의 정치행태가 아닌가 싶다. 그것은 왕조시대나 현대사회도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모두 역사나 문화로 기록되어 세대를 초월한 모든 사람들의 나침반이 될 수는 없다. 어떤 현상(사건)이 한세대의 역사가 되려면 구비요건이 필요하다. 역사가 탄생한 세대가 아닌 다른 세대에서도 그 현상이 적어도 중요하고 의미있다고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같은 인식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면 어떤 이슈(issue)화된 컨센서스를 행동화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때문에 지식인들의 역사의식이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도 중요하다 하겠다.
소위 ‘역사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굴레벗은 망아지처럼 초원을 뛰어다니면 그를 이미 지식인의 영역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에겐 누구나 자기굴레가 있다. 그 굴레를 벗어버리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거대한 연극무대다. 그 연극무대에서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 관객에게 호평을 받으면 더욱 인기를 얻어 다음공연엔 더 빛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 아닐까. 아름다움에는 그 아름다움 자체도 있지만 삶에는 여러 종류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중엔 절제(節制)의 미(美) 또한 상당한 상위 순위로 꼽힐 것이다.
남자에 있어 절제의 아름다움은 여성이 정절(貞節)을 지키는 성스러움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의 지고의 아름다움을 정절이라 한다면 남성의 최고의 아름다움은 신념있는 행동일 것이다. 신념있는 행동, 그것은 종교와도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지식인에 있어 종교와도 같은 것은 민족과 국가의 숨결인 역사를 믿고 지키는 일일 것이다. 지식인이 인고의 시간이 필요함은 어느 특정 이익집단편에 서면 몸과 마음의 불편함을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특정 다수인 국민편에 섰다해서 정신적으로 홀가분한 것만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나 사회를 보는 시각이 다르면 끝없는 세뇌작전 내지는 사회와의 차단(遮斷)을 꾀하기 때문이다.
그같은 상황은 대부분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특정집단이 국민과 컨센서스를 통하지 않고 물리적인 국민의 권리를 박탈했을 때 그 탄압의 강도는 높다 하겠다.
지식인의 역할이 어렵다는 것은 항상 편할 날이 없다는 것이다. 어느쪽 어느 편에 서도 힐난(詰難), 비판, 폄하의 도가 적고 많음의 차이가 있을 뿐 항상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도한 그 같은 세평(世評)에 대해 두툼한 배짱이 없으면 역사에 대한 멍에를 메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굴레’ 그것이 지식인의 족쇄와도 같다고 한다면 지나친 도그마(dogma)에 가두는 것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