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칼럼/ 인문학이 더 필요한 인공지능(AI)시대
시정칼럼/ 인문학이 더 필요한 인공지능(AI)시대
  • 김영섭 논설위원·동대문문화원장
  • 승인 2018.03.22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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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섭 논설위원·동대문문화원장

 

[시정일보]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3세기 정도의 시간을 두고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세기말부터 20세기까지 제조와 기술 중심의 2차 산업혁명과 인터넷과 서비스 중심의 3차 산업혁명을 거쳐 드디어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불과 1세기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1900년대 즉 20세기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모두가 실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1,2,3차의 변화를, 지난 20세기 한 세기만에 모두 경험 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직접 경험하고 배운 바로도 190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우리의 경제는 그야말로 1차 산업에 의존하였으며, 규모도 크지 않았다. 이후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20세기 중반에 와서야 제조업과 기술개발 중심의 산업입국을 부르짖었으며, 20세기 말에 이르러 인터넷과 정보통신, 서비스 산업을 망라하여 3차 산업사회를 열었다.

이후 우리의 산업 역시 지속적인 발전과 변화를 이루었고, 과학기술의 발달은 급기야 인공지능의 시대를 열었고, 그것은 AI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일상과 생활 깊숙이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러는 사이 인간사회는 점점 개인주의화되어가고 이제는 사람과의 소통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기계를 통하여 만족을 찾을 뿐 아니라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편으로 삼으려 한다.

사실 우리는 인공지능이라고 하면 그저 먼 미래에 펼쳐질 만화나 공상과학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그러나 얼마 전 인공지능 알파고와 인간인 이세돌의 바둑 시합을 보면서 그것이 결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놀랐던 것은 보통 생각할 때 바둑이라고 하면 워낙 경우의 수가 많아 그때그때 수를 생각해내야 하기 때문에 단순한 연산기술로는 사람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였지만 결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요구하는 바를 실행하거나, 때론 적절한 대꾸를 하며 대화를 이어가는 기술은 이미 우리의 생활 속에 자리 잡아가고 있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자제품 역시 사물인터넷과 빅 데이터와 인공지능 등으로 스스로 알아서 작동하고, 알아서 관리하기도 한다. 그만큼 사람의 손이 필요 없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게 되었고, 이제는 단순한 기계의 사용이 아니라 기계와의 공존 그리고 소통을 생각해야 할 시대가 되었다고 AI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의 삶은 엄청난 변화를 보일 것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필요성이다.

고도화된 기술산업시대에 새롭게 대두되는 인문학은 단순한 인간에게 필요한 교육 분야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은 단순한 기능성 기계가 아니며, 이제는 사람들과 함께 사람의 일을 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기술 역시도 인문학을 기초로 개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역에 들어온 기계의 활약만큼 인간성의 박탈이 가져올 폐해를 지적하기도 한다.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이 기계 뒤에 숨어 저질러지는 익명의 범죄이다. 그것은 단순히 온라인상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 사회에서 새로운 범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결과 윤리와 도덕이 결여되고 흉악한 범죄의 발생은 물론 대형 인명사고에도 무기력해지고 무감각해지게 되는 것이다.

과거 우리는 어른들로부터 혼자 있으면서도 몸과 마음가짐을 단정히 하기를 교육받았다.

자아성찰에 대한 교육을 받으면서 또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이야기를 하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취급을 받는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인문학의 중요성이 회자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인문학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학문이 아니라 과학적, 생물학적 시각에서 접근과 해석이 필요한 학문이라고 한다.

인문학을 통하여 시대의 문화를 바르게 이해하고 인간적인 교양을 기를 뿐 아니라 건전한 비판 정신을 길러야 미래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요소를 예견하고 더 큰 비극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말은 오늘날 인간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으며 그것은 인문학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