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제도 비례성 강화, 국민 삶을 바꾼다
선거제도 비례성 강화, 국민 삶을 바꾼다
  • 이승열
  • 승인 2018.05.10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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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신문 창간 30주년 기획
지난해 7월22일 국회 제352회 임시회 제3차 본회의에서 추가경정예산안을 처리하고 있는 모습.
지난해 7월22일 국회 제352회 임시회 제3차 본회의에서 추가경정예산안을 처리하고 있는 모습.

 

[시정일보 이승열 기자]6·13 지방선거와 헌법개정을 위한 국민투표 동시 실시가 무산됐다. 여야 간 다툼으로 국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탓이다. 촛불혁명 이후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국민의 열망을 제대로 받아 안지 못한, 아쉬운 일이다.

개헌과 관련해 국민과 정치권의 최대 관심사는 권력구조 개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에 제출한 개헌안에는 대통령제를 유지하되 4년 연임제로 바꾸는 내용이 포함됐다. 반면 야권 등 일부에서는 ‘제왕적 대통령’에 집중된 강력한 권력을 분산하기 위해 분권형 대통령제, 의회에 의한 국무총리 선출, 의원내각제 등을 도입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국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비례성 강화를 목표로 하는 ‘선거제도 개혁’이 무엇보다 우선돼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사회적 약자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올바르게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의회에 다양한 정치세력이 진출하고, 그에 부합하는 합의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본지는 창간 30주년을 맞아, 국민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정치제도 개선, 특히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의 필요성에 대해 짚어보고자 한다. - 편집자주

 

풍경 1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 2016년 제20대 총선을 앞두고 ‘전국 6개 권역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제안했다. 전국을 6개 권역으로 나누고 인구비례에 따라 각 지역에 의석을 배분한 뒤, 각 권역 내에서 정당투표와 지역구투표를 모두 실시하는 제도다.

이 제도는 당시 과반 의석을 가지고 있었던 새누리당의 반대로 도입이 무산됐다. 이후 여야는 협상을 통해, 소선거구+비례대표 병립형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지역구 의원은 253명으로 늘리고 비례대표는 47명으로 줄였다. 중앙선관위의 제안에 역행하는 개악(改惡)을 자행한 것이다.

풍경 2

대 총선 당시 국민의당은 호남 지역에서 절반에 못 미치는 46.08%를 득표하고서도 총 28석 중 23석(82%)를 가져갔다. 반면 정의당은 6.85%를 득표했는데도 1석도 가져가지 못했고, 정의당보다 득표율이 낮았던 새누리당은 2석 확보에 성공했다.

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전체 지역구에서 37%의 득표율을 차지했는데, 실제 지역구 당선자는 253명 중 110명이었다. 20대 총선에서 낙선자에게 간 투표, 즉 사표(死票)는 1225만8430표로, 50.32%에 달했다. 절반이 넘는 유권자의 의사가 사장, 또는 폐기된 것이다.

풍경 3

서울시의회는 지난 3월20일, 서울시 자치구의회 의원 선거구 획정을 위한 임시회를 열어, 애초 4인 선거구 35개를 새로 만드는 것을 골자로 하던 서울시선거구획정위원회의 획정안을 대폭 뜯어고쳤다. 그 결과 4인 선거구 수는 ‘0’이 됐다.

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 구의원 선거구 159개 중 2인 선거구는 70%에 가까운 111개였고, 나머지 48개도 3인선거구였다. 그 결과 대부분의 2인선거구에서 두 거대 정당 후보들이 당선됐으며, 이중 22명은 무투표 당선되기도 했다.

위 3가지 풍경들은 현재의 선거제도가 얼마나 철저하게 거대정당의 기득권에 복무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또 소선거구와 승자 독점 중심의 선거제도를 개혁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드러내고 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치, ‘선거제도 개혁’부터

최근 최태욱 한림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가 펴낸 소설 <청년의인당>은 선거제도 개혁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소설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별된다. 전반부는 선거제도 개혁을 강조하는 진보 성향의 학자 한석, 소상공인 정치세력화를 꾀하는 변호사 최드림, 기자 출신으로 청년을 위한 시민단체 활동가인 이혜리 등의 주요 인물들이 선거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는 이야기로 꾸며진다. 이들은 비례대표제를 통해 합의제 민주주의를 구현해 복지국가의 모범이 된 네덜란드의 사례를 배우며, 선거제도 개혁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가장 중요한 필요조건임을 깨닫게 된다.

후반부는 이들이 실제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선거제도 개혁에 이어 합의제 민주주의를 위한 개헌을 이루는 과정을 보여준다. 비현실적 미래를 덧없게 그린 공상소설이나 판타지로 빠지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를 불식하고, 작가는 주인공들이 그 성과를 이뤄내기까지 무려 25년에 걸쳐 어려운 싸움을 해 나가는 과정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소설은 선거제도를 바꿔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치를 작동시키면 사회적 약자의 삶이 바뀐다고 주장한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주인을 제대로 모시지 않거나 모시지 못하는 대리인이 자꾸 선출돼 나라가 제 구실을 못한다면 그것은 선거제도가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자신들의 대리인만 제대로 뽑을 수 있다면,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강자가 돼 스스로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이다.

소설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게임의 결과는 크게 두 가지 변수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는 선수·행위자이고, 다른 하나는 규칙·제도이다. 그런데 관중들은 대개 선수에만 집중할 뿐 규칙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정치에서도 행위자와 제도가 둘 다 중요하지만, 긴 시간에 걸쳐 행위자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별로 개선되지 않는다면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네덜란드의 사례를 든다. 네덜란드가 다수 정당이 원내에 진출하는 다당제 속에서도 중도지향성과 합의지향성을 유지하면서 합의제 민주주의를 통해 복지국가 건설에 성공한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 정치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은 바로 비례대표제이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주화 이후 30년이 넘었건만 왜 우리나라는 약자를 위한 재분배, 청년복지 등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약자를 대표하는 ‘힘 있는 정치 세력’, 즉 유력 정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정당이 없는 건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비례성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비례성은 각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 점유율 사이 비례 정도를 뜻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유권자 표심 왜곡 막아

그렇다면 비례대표제는 무엇인가? 이는 정당의 득표율대로 의석을 배분해 사표(死票)를 방지하는 제도를 말한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지역구 선거는 1인 소선거구제도인데, 만약 49%의 득표율로 1위를 했다면 나머지 51%는 모두 사표가 된다. 절반이 넘는 민의가 배제되는 것이다. 철저하게 민의를 왜곡하는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다. 지난 20대 총선에서 정의당은 6석을 얻었는데, 정당 지지율은 7.2%였다. 지지율대로라면 20석 이상을 차지해 교섭단체 지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렇다면 비례대표제는 어떻게 운영되는가? 우리나라는 소선거구제와 전국 비례대표를 독립적으로 뽑는 ‘병립형 비례대표제’를 쓰고 있다. 현재 의석수는 지역구 253석, 비례대표 47석이다. 반면, 정당 득표율을 되도록 정확하게 반영해 민의를 왜곡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독일은 지역구별로 1명을 뽑는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를 혼합한 ‘권역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운영한다. 유권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2표 중 1표는 지역구 출마자에게, 다른 한 표는 지지하는 정당에 투표한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와 같다.

차이는 의석 배분에서 나타난다. 독일은 지역구 선거와 정당 투표를 연동해(50:50) 전체 의석수를 결정한다. 만약 A당과 B당의 지역구 당선자가 각각 40명과 10명이고 정당 지지율이 60%와 40%라면, 비례대표 당선자를 할당해 전체 의원 수가 A당 60명, B당 40명이 되도록 한다.

여기서 초과의석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예컨대 지역구 50석, 정당명부 50석인 지역에서 A당이 40명의 지역구에서 승리했으나 지지율이 30%에 불과한 경우, 초과당선자 10명은 탈락하지 않고 의원직을 유지한다. 지난 2012년 개정된 선거법에 따르면, 다수당의 초과의석이 발생할 경우, 그것이 정당 득표율에 따른 의석 배분 비율을 침해하지 않을 때까지 전체 의석을 늘리는 ‘보정의석’을 만들어 배분한다.

현재 독일의 연방하원에서는 지역구 299명, 정당명부 의원 299명 등 총 598명의 의원을 뽑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원칙으로 한다’는 것은 초과의석으로 의석수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총 16개 주의 인구비례에 따라 지역구가 배분되며, 각 주에는 지역구 개수 만큼의 정당명부 의원 정원이 배분된다.

이 같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비례성이 높아져 유권자의 의사가 왜곡되지 않게 하고, 자신의 선호를 소신 있게 표시할 수 있게 한다. 또 인물과 지역이 아닌, 이념과 정책에 기초한 정당정치를 이끌어 낸다. 이를 통해 정당의 민주적 책임성을 향상시킨다.

다만 우리나라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경우 독일식 ‘권역별’이 아니라 뉴질랜드식 ‘전국 단위’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김형철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교수는 “우리나라는 강한 지역정당체계를 갖고 있는 정치적 조건 때문에 초과의석의 문제가 과다하게 발생할 수 있으며, 초과의석이 주로 거대정당에게 주어져 정치적 대표성의 왜곡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지역 대표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권력구조 개헌보다 선거제도 개혁 먼저

최태욱 교수는 소설 <청년의인당>에서 “국가가 모든 시민에게 사회적 자유를 평등하게 보장하려면 우선 선거제도부터 뜯어고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명실상부한 비례대표제를 우선적으로 도입함으로써 다양한 사회경제적 계층·부문을 당의 기반으로 삼는 여러 정당이 경쟁적으로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제와 같은 연정형 권력구조를 도입해 합의제 민주주의를 작동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 박명호 동국대학교 교수는 대통령제 정부 형태를 유지한다면 선거제도에서 비례성을 강화하는 게 제한적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박 교수는 “의회내 다당제가 나타나더라도 일시적 현상에 불과해 결국 양당제 경향, 또는 양대 블록화 현상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즉, 대통령의 ‘후광효과’ 때문에 대통령제 정부형태 자체가 다당제 경향을 억제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다당제보다는 양당제 경향이 대통령제와 적합하다고 한다. 반면 내각제나 이원집정제의 경우, 상대적으로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를 사용하는 것이 대통령제보다 용이하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보다 선거제도의 개혁이 더욱 시급하다는 것이다. 소설 <청년의인당>에서는 “지역주의가 엄존하고 정치 시장을 소수의 지역정당이 독과점하고 있는 가운데 권력구조만 바꾸면 지역할거주의가 더욱 강화될 게 분명하다”고 지적하는 대목이 나온다. 권력구조는 지역정당들의 과두체제로 개악(改惡)되고, 사회경제적 약자를 대표하는 정당의 원내 진출과 복지국가 건설은 더욱 멀어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선거제도 개혁을 권력구조 개헌보다 앞서, 최소한 병행해 추진해야 한다.

이승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