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칼럼/ 혐오는 말로만 끝나지 않는다
시정칼럼/ 혐오는 말로만 끝나지 않는다
  • 임춘식 논설위원
  • 승인 2019.03.28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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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최근 들어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가 우리 사회에 일상적이고 전면적으로 퍼지면서 사회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혐오는 말로만 끝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 어떻게 터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요새 이민자 혐오 범죄로 50명이 숨진 뉴질랜드 총격 테러가 발생한 시점에 우리 사회도 심각하게 볼 문제다.

혐오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구조적 차별이자 공격이다.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결국 사회통합을 가로막아 다양한 구성원이 인권을 보장받기 어렵게 된다. 사회·경제적으로 변동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 혐오가 많이 생겨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가 차별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혐오와 차별은 별개가 아니라 서로의 원인과 결과로 상호작용하면서 구조화된다. 혐오에 따른 위협이 기득권에게는 가해지지 않는다. 타깃은 언제나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일 뿐이다. 이들을 공격하는 혐오표현은 표현의 자유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 혐오표현의 발화자가 누구인지, 이 말이 어떻게 확대 재생산되는지 그 맥락을 분석해야 한다.

혐오의 주요 대상은 주로 노인이나 여성, 이주민,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일각에선 ‘한국 사회에서 누가 사회적 약자인가’라고 반문하기도 한다.

어쨌든 우리 사회의 저변에 흐르는 기류를 설명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혐오다. 남녀와 노소, 빈부로 나뉘어 서로를 미워하는 건 물론이고, 조선족 동포와 탈북자에 대해서도 불신과 적의의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이런 혐오 감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신조어가 벌레를 뜻하는 ‘충(蟲)'이다. 반감을 지닌 대상 뒤에 붙여서 비하와 경멸의 의미를 덧씌운다.

이를테면 아이를 키우는 기혼 여성은 ‘맘충'이고, 한국 남자들은 ‘한남충'이다. 학교 급식을 먹는 10대는 ‘급식충'이고, 연금받는 노년층은 '연금충'으로 부른다. “우리는 우리의 적을 증오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적(敵)이 사라지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줄어들고 말 것”이라는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탄식이 예사롭지 않다.

왜 우리는 서로를 죽자 사자 미워하는 걸까. 증오의 감정을 확산시키는 불쏘시개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면전에서는 입에 담지 못할 비열한 욕설과 험담을 허용하는 익명(匿名)의 온라인 공간이 우선이라면, 당장의 인기를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자극적 언어를 쏟아내는 정치인들의 저열한 셈법이 극치를 이룬다. 그 증오와 대립이 어떤 형태의 위험으로 나아갈지 아무도 모른다.

예를 들면 세대갈등과 노인혐오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잊을 만하면 언론에는 지하철, 버스, 공공장소 등에서 노인과 청년이 다툼을 벌이다 심할 경우 형사사건까지 가는 문제가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노인을 보는 청년세대 눈길은 싸늘하다. 어느 순간부터 ‘노인충'(노인+벌레), ‘틀딱충(틀니를 딱딱거리는 노인)'이란 노인혐오 표현이 인터넷에 넘친다. 성장배경 차이에 따른 세대 간 불통과 노인 접점이 없는 사회를 원인으로 꼽는다.

노인혐오는 말 그대로 노인층에 대한 혐오를 뜻한다. 가장 큰 이유는 세대 차이다. 그 중에서도 구조적 요인으로 인해 젊은 세대 계층이 가지는 노인에 대한 떨어지는 접근성이 이러한 혐오를 쉽게 분출하게 한다. 살아온 세계가 다른 데다가 서로 간에 접촉할 틈새도 없으니 당연히 문화가 다르고,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로 성향이 나눠지면서 전체주의를 중시하는 노인계층에 대한 반감이 극단적인 형태로 분출되는 것이다.

정치노선에서 노인층이 대체로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청년층이 대체로 진보적 성향을 가진다는 차이도 노인 혐오(혹은 노인층에서 있을 청년 혐오)를 만드는 큰 원인이 된다. 사실, 이러한 보혁 대립은 본래부터 세대가 변할 때마다 존재해온 세대갈등의 대표적인 예시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일부 노인계층과 신세대계층이 자신의 정치노선에 대한 강렬한 자부심과 상대편에 대한 혐오를 그대로 표현하다보니 점차 문제시 되는 것. 그러나 노인층에서도 진보권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있고, 반대로 젊은 층에서도 보수권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이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해당한다.

지성적 대화, 판단이 사라진 우리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제 부터라도 정부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혐오와 차별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혐오 표현이 차별로 이어지고, 결국 혐오차별이 공존을 해친다는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그리고 양극화와 차별을 넘어 누구나 존중받는 인권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차별금지법’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 한남대 명예교수(사회복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