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은 진보와 보수를 아우른다
공감은 진보와 보수를 아우른다
  • 노웅래 국회의원
  • 승인 2020.09.17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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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웅래 국회의원 (더민주, 서울마포갑)

[시정일보] 우리 사회는 진보와 보수가 팽팽한 균형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데일리안>이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알앤써치>에 의뢰해 실시한 2019년 8월 정례조사에 따르면 자신의 정치성향을 ‘진보’와 ‘보수’라고 응답한 비율이 14.9%로 동일하게 나타났다. 자신을 ‘중도보수’(26.6%) 또는 ‘중도진보’(25.0%) 성향이라고 응답한 비중 역시 비슷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다보니 거의 모든 사안에 팽팽한 견해 차이를 드러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진보’와 ‘보수’를 간단히 정의한 바 있다. 그의 고향 진영에는 승객으로 항상 만원인 버스가 하루 몇 번 다녔다. 그래서 중간 중간 버스가 서는 곳에서는 늘 손님들이 버스를 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때 기사를 향해 ‘만원이니 그냥 갑시다, 더 실을 곳이 없다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보수요’, 이미 타고 있는 승객들을 향해 ‘같이 가게 안으로 조금씩 이동합시다’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은 진보라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진보개념은 ‘배려의 진보’다. 의미 있고 명쾌한 정의다.

나 역시 평생을 진보의 가치를 추구해 왔다. 내가 생각하는 진보는 ‘약자와 공감하는 마음의 표현’이고, ‘억압에 분노하고,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분노와 행동은 절제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극악한 군부독재 시절에 불의와 폭력에 맞서 싸워온 ‘마포새우젓 정치인 노승환’의 아들로 살면서 이러한 진보의 개념을 체득했다.

늘 감시당했던 선친은 청렴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는 선친에게서 그것을 배웠다. 선친은 부정의에 분노하면서도 감정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기자가 된 배경도 이것이었다. 야당 정치인의 아들이란 이유로 불공정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항상 ‘니 아부지 뭐하시노?’였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추구하는 진보의 이념은 정의와 공정이었다. 나는 ‘진실이 정의다’라는 믿음으로 ‘부정의’에 맞섰다.

MBC 기자 시절이었다. 노조위원장에 선출될 때까지 나는 평조합원일뿐 노조간부로 활동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내외의 부정의에는 항상 함께했다.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의 언론장악에 맞서기 위해 평조합원이면서도 1995년 공정방송을 요구하며 9일간의 단식투쟁을 주도하였다. 노조원들을 한데 뭉치게 하였고, 결국 노조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그런데 전임 노조위원장들이 논의를 마치고 노조 간부가 아닌 나에게 노조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MBC노조는 전임 노조위원장들이 논의하여 차기 노조위원장을 추천하면 노조원들이 찬반투표로 결정했다. 군사정권의 오랜 노조탄압에 맞서 노조의 방향성을 지키려는 고육책이었다.

노조 간부가 아닌 내가 전임위원장들의 추천으로 후보로 나선 것은 의외의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2001년 노조원 투표에서 90%가 넘는 지지를 받아 위원장이 되었다. 내게 노조위원장을 맡아 달라는 이유는, 과격하지 않고 부드러우나 꺾이지 않는 내가 적격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노조위원장 2년의 임기동안 MBC 내의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위해 부단히 싸웠다.

1998년 제정된 ‘파견노동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2년간 동일 직무를 수행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되어 있었다. MBC 사측은 비정규직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았다. 나는 이를 문제 삼고 정규직화를 추진하였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 사회분위기는 더욱 부정적 기류였다. 전경련을 비롯한 경제5단체와 한나라당은 앞장서서 법을 무력화하고 있었다. 법적 뒷받침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방향을 수정했다. MBC 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킬 수는 없지만, 정규직들도 함께 고통을 분담해야 하지 않겠냐고 판단했다. 나는 정규직 직원들과의 대화를 통해 고통분담을 호소했다. 그들은 기꺼이 고통분담에 동참했다. 정규직 임금을 동결하는 대신 비정규직 임금을 2년 연속 25% 포인트씩 올렸다. 그 결과 정규직과의 임금격차를 상당히 좁혔다.

노조위원장을 하면서 어려운 고비 때마다 조합원총회를 열었다. 조합원총회에 참석한 거의 모든 구성원들은 ‘정의’와 ‘양심’과 ‘신념’에 따라 행동하자는 주장에 대부분 동의했다. 위계질서를 뛰어넘어 서로를 비판하고 자기반성을 요구하는 총회장이 되었고, ‘할 말은 하고 바른 말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공론장이 되었다.

정치에 입문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양심대로 행하면 정의롭고, 정의의 편에 서면 공정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신념이 그것이다. 정치를 하면서 내가 견지할 진보의 이념은 무엇인가를 항상 고민한다. 2013년 이마트 노동자들에 대한 기업의 탄압에 맞서 싸운 것도, 1만2천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전원 정규직화 하는데 앞장선 것도 정의와 공정의 실현이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근소한 차이로 낙선했다. 누구보다 지역발전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는데, 지역주민들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서운하기도 했다. 호칭도 ‘노 의원’에서 ‘노웅래 씨’로 바뀌었다. 지역을 돌아다니기가 난망했다.

그때 선택한 것이 중국 유학길이었다. 그곳에서 공부하면서 중국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변화는 무서웠다.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대륙의 끝자락에 위치한 대한민국으로서는 21세기에 세계를 주도하는 데는 한계가 느껴졌다. 우리가 대륙으로 진출하지 못하면 안 되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대륙으로 진출하는 방법에 대해 깊은 고민의 시간을 보냈다.

나의 결론은 통일은 지상과제이지만, 지금 더 중요한 것은 남북한이 화해의 길을 함께 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북한이 화해하고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하게 되면 우리는 대륙으로 바로 진출할 수 있고 한반도는 동북아지역의 해양 전초기지로서 역할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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