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마키아벨리부터 그람시 '시대의 반항아'를 좇아
서평/ 마키아벨리부터 그람시 '시대의 반항아'를 좇아
  • 임춘식 논설위원
  • 승인 2020.11.16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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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의 이탈리아 사상기행 '물속에 쓴 이름들' 출간
정치학자의 카메라에 포착된 자연과, 사람과 문화 그 너머의 이야기들

[시정일보]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예술과 미식의 나라 이탈리아를 색다르게 다녀온 독특한 기록이다. 길에서 흔적을 찾고, 그 흔적들에서 잊혀져선 안 될 생각들을 더듬는다. 많은 사람이 이탈리아로 관광 여행과 예술 기행을 떠난다. 그렇지만 이탈리아는 마키아벨리와 그람시라는 정치 사상가를 낳은 나라 기행은 드물다.

로마, 투리, 시칠리아, 피렌체, 이몰라, 피사, 빈치, 제노바, 토리노, 사르데냐까지 22일에 걸친 기행에 담긴 이탈리아는 다양한 사람들이 시대의 제약과 개인적 한계 속에서 자기만의 사상을 펼친 ‘사상의 나라’임에 틀립없다.

고문과 유배가 횡행하고 전쟁과 파시즘이 창궐하는 ‘반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다 간 ‘시대의 반항아’의 목록에는 니콜로 마키아벨리와 안토니오 그람시를 중심축으로 알리기에리 단테, 갈릴레오 갈릴레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주세페 가리발디 등이 이름을 올렸다. 《물속에 쓴 이름들》은 이 ‘시대의 반항아’들이 남긴 흔적을 돌아본 사상 기행인 셈이다.

《물속에 쓴 이름들》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500년 넘게 권모술수의 대가이자 군주론자로 오해받는 마키아벨리 이야기다. 피렌체에서 태어난 마키아벨리는 공화정에 가담한 혐의로 유배를 간 뒤 《군주론》을 써 자기를 쫓아낸 메디치가에 헌정했다. 군주정 때문에 고난을 겪은 공화주의자는 왜 군주를 위해 악명 높은 《군주론》을 쓴 걸까? 피렌체와 이몰라, 피사 등을 돌며 ‘진짜 마키아벨리’를 찾아본다.

다음은 시민사회와 헤게모니의 이론가이자 《옥중수고》를 쓴 그람시다. 곳곳에서 ‘그람시’라는 이름을 단 길과 건물을 만날 때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라는 현실에 뿌리내린 진보의 과거와 미래를 상징하는 단어로 다가온다.

‘이탈리아의 호남’인 사르데냐에서 태어난 그람시는 자동차의 도시 토리노에서 활동하다가 공산당 소속 국회의원이 되지만, 20년 4개월 5일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람시가 갇혀 있던 투리 교도소에서 시작해, 대학을 다니고 노동운동을 한 토리노, 의원 활동을 하고 죽음으로 안식을 얻은 로마를 거쳐 추모식이 열린 길라르차까지 그람시의 길을 좇아간다. 허름한 하숙집이 최고급 호텔로 바뀌고 그람시의 후예인 좌파 정당들은 지리멸렬하지만, ‘21세기의 군주’를 찾아 ‘조직화하되 제도화되지 않는’ 길을 개척하는 데 그람시가 남긴 문제의식은 여전히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두 거인의 흔적을 좇다가 마주친 아름다운 풍광과 예술 작품, 사람들을 만난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작품, 이집트 박물관을 가득 채운 식민 시대의 유물, 피렌체 출신인 단테, 피사와 피렌체에서 활동한 갈릴레이, ‘역사상 가장 완벽한 전인적 인간’이라는 다빈치, 자본주의 패권국에서 태어나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이탈리아 통일의 아버지 가리발디 등 이탈리아의 과거를 살다 간 사람들과 친절한 민박집 주인부터 그람시 기일을 기념하는 토리노의 ‘적기 부대’ (재건공산당 당원)까지 이탈리아의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이 책의 등장인물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이탈리아는 예술의 나라이자 미식의 땅이다. 알프스 산맥의 만년설이 반짝이는 북부에서 푸른 평원이 드넓게 펼쳐진 중부를 거쳐 햇살 뜨거운 남부까지, 어느 곳을 가든 맛있는 음식과 유적이 여행자를 반긴다.

괴테와 니체,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쓴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등의 사연이 얽힌 타오르미나, 바닷가에 자리한 ‘작은 다섯 천국’ 친퀘테레, 콜럼버스의 고향이자 세계 최초의 자본주의 패권국인 제노바, 파스타를 처음 만든 시칠리아의 트라비아, 피렌체의 정육 식당에서 원조 티본스테이크, 느끼함의 끝판왕 곱창버거, 그람시 기일에 길라르차에서 대접받은 사르데냐풍 음식은 모두 이탈리아라는 매력적인 단어로 응축된다.

여행하고 사진 찍는 정치학자 손호철은 이 모든 자연과 사람과 문화를 카메라에 담고, 보이는 것 너머에 감춰진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바로 이 책 《물속에 쓴 이름들》이다.

진보적 정치학자인 손호철 교수는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선배를 잘못 만나 운동권이 됐고,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신군부가 저지른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가야 했다. 귀국한 뒤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사회과학대 학장과 대학원장 등을 지냈다.

2018년 정년을 마친 뒤 서강대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정의당 정의정책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국정치연구회 회장, 복지국가연구회 회장, 《진보평론》 공동대표,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국정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진실위) 위원 등을 지내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 온 독특한 인물이다.

임춘식 논설위원 chsri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