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조선족으로 살아야만 했던 그 시절
기고/ 조선족으로 살아야만 했던 그 시절
  • 동경 하주현
  • 승인 2021.04.27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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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하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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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하주현

[시정일보] 필자는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살면서 엄마 아버지가 지방 민정국으로부터 유공자의 대접을 받아온 것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알았지만 구체적으로는 저의 큰오빠가 쓴 <나의 아버지>를 읽으면서 알게된 진실에 한편으론 감동과 존경, 한편으론 큰 충격을 받았다.

감동받았던 것은 아버지의 무한한 가족사랑과 위대한 꿈을 하나하나 묵묵히 실천하셨던 훌륭한 아버지였다는 사실이였다. 필자가 아는 아버지는 평소에도 너무 엄격하고 무서운 존재였었기에 말도 제대로 못붙였었다.

그러나 작은 아버지들이 중국에서 군에 참가하면서 일본놈들과 싸우셨던 것까지는 참 뿌듯했는데 6.25전쟁에 막내 작은아버지가 참전한 것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참전이였다고는 하지만 우리 후손들이 마땅히 한국정부에 머리숙여 사죄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중국에 있는 수많은 조선족들이 선봉에 뽑혀 조선전쟁에 참가 했다고 들었다. 한반도의 동족상잔의 뼈아픈 역사에 동참한 작은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반성하며 사과드리고 싶다. 아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사과드린다.

다음은 큰 오빠가 쓴 <나의 아버지>를 올려본다.

                                  나의 아버지

아버지 하이규는 1918년 조선 경남 밀양시 무안면 가례리 836번지에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둘째이고 형인 하대규는 아버지보다 7살이 더 많고, 3살연하 여동생 하순규, 셋째 동생 하상규는 7살 연하, 넷째 동생 하칠규는 10살 연하, 다섯째 하팔규는 아버지보다 13살 어리다.

아버지는 일곱살 때 일을 시작하여 줄곧 집안의 훌륭한 일꾼이었으며, 할아버지의 훌륭한 조수로서 튼튼한 몸을 가지셨다. 형은 그렇지 않다. 할아버지가 3대독자이시다 보니 첫째 아들을 얻으니 당연 기쁘기 마련이였다. 할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여 형은 어려서부터 술 마시는 데 습관이 되셨고, 단속도 하지 않고 자유로웠다. 이런 편애로 장손인 큰형은 늘 손하나 까딱 안하고 먹고 노는 도련님이었다. 식구들이 조선에서 생활하며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고 끼니를 거르기가 일쑤였다. 정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따라서 일본 정부의 홍보에 의하면 만주국에 가서 일하면 밥을 배불리 먹는다고 한다.

1934년 더 이상 배고픔을 못견뎌 할아버지가 온 가족을 이끌고 중국 만주에 가게 된다.

막 타국에 도착했을 때, 사람도 낯설고 언어는 통하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검은콩 50근으로 열네 살 난 딸을 다른 가족에 보냈고, 그집도 그럭저럭 사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딸을 팔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온 가족이 남의 초가집 안에 들어앉아 사방이 바람으로 가득하고, 바닥에 어지러운 볏집이 깔려 있는 것이 보금자리였었다. 다행히 자선가가 있어서 매일 아침 죽을 묽게 끓여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 비록 매일 이 끼니뿐이지만 이 가족은 그나마 먹고 살 수 있었다. 온 가족이 들판에 나물을 캐고 먹을 것이라면 모두 주워와서 허기를 채웠다. 이어 그 해 추운 겨울을 어떻게 견디어 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초봄 할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찾은 영길현 통자구(桶孑沟)에는 조선족들이 지주들의 벼농사를 하는 일이 많았다. 할아버지는 지주를 위해 날품팔이를 하시고 우리 아버지는 먼 길을 떠나 일을 찾으셨다.

처음에 철도 도로 보수공단에서 일을 찾았는데 일을 좀 해보니 너무 수월하고 돈도 많이 벌지 않아 다른 곳으로 옮기려 알아보니 벌목장의 일이 힘들고 위험하지만 돈은 많이 벌 수 있다고 하여 아버지는 깊은 산 벌목장에 와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열정을 다해 죽으라 일을 했고 끊이지 않고 돈을 벌어 집으로 보냈다.  그사이 할아버지는 큰아버지에게 며느리를 세 번 얻어다 주었지만 며느리들이 하나둘씩 떠난 지 오래다. 돈이 생기면 아버지는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 커서 잘 되기를 바라셨다. 셋째 동생은 나이가 많아 4년만 공부해야 했다. 넷째 동생, 다섯째 모두 고소(高小)졸업. 고소는 그때만 해도 상당한 지식인이었다. 그 시대에는 가난한 아이들 대부분이 공부를 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길가에 본채 세 칸, 사랑채 두 칸을 지으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상의한 후 별당에 방앗간을 차려 기계, 설비 일체를 사서 영업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하가는 중국에서 입지를 굳혔고, 앞으로 더욱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셋째, 넷째, 다섯째는 집에서도 할 일이 있게 되어 기뻐했지만 첫째는 일은 하지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밥먹고 술먹고 놀음하며 다니기만 했다. 여기저기 외상해놓고 다녔지만 그 집에 가공 공장이 있기 때문에 술집, 밥집에서는 외상을 막 해주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 술친구들에게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면서도 얻어맞는 일이 잦았다. 큰형이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자, 동생들이 이 화를 삼키지 못하고 나가서 상대방을 혼내 주는 것은 늘 있는 일이였다. 그래서 당시 하가 오형제가 만만찮게 명성을 날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연말이 되자 시끌벅적하며, 각지의 술집 밥집주인들이 외상값을 받으러 왔다. 술값으로는 한 해 벌어들이는 돈을 다 갚고도 부족하였다. 동생들이 화가 잔뜩 났다. 열심히 일을 했지만 큰형의 외상값 때문에 결국에는 큰 빚을 지게되자 가공공장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어쩔 수 없이 기계를 싼 값에 양도하여 쌀가공 공장은 파산 신고를 하였다.

나중에 아버지는 '방앗간을 파산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해방됐을 때 투쟁받았을꺼다' 라고 재치있게 말하였다.​

1943년 가을, 할아버지는 개고기를 먹는 이웃에 의해 잔치에 초대되었다가 개고기 중독으로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셋째동생은 당시 일본이 강제로 군징수 한다고 해서 조선에 가고 집에 없었고 집에 있던 버팀목이 없어지자 아버지는 벌목장 일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셔야만 했다.

아버지는 1944년 어머니와 결혼해 가정을 꾸려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큰아버지가 아직 독신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들을 부탁해 조선 충청도에서 큰어머니를 모셔와 큰아버지와 결혼시켜 주시고 따로 살림을 마련해주셨다. 1945년 19세의 넷째 동생은 팔로군(1종·38군)에 참가했고, 같은 해 22세의 셋째 동생이 의용군에 참가했다. 다섯째 동생은 아동단 단장을 하며 팔로군 72연대를 위해 보초, 송신, 홍보 등의 활동을 했다. 1947년이 되자 16세의 다섯째 동생이 이 부대가 이동하게 되면서 입대(10종47군)했다. 이어 국공합작이 결렬되자 국민당군은 해방구에 진입했고, 우리 집은 국민당으로부터 불심검문을 당했다. 이웃들이 나와서 (모두 한족 이웃들) 보호하는데, 특히 양씨네의 힘을 잊지 못한다. 아버지는 뒤늦게 양씨 집안의 권유를 듣고 홀몸으로 어머니와 함께 집을 떠나 반석 역마하(驿马河) 얼따오땐즈(二道甸子) 부락으로 피신했다. 통즈거우(桶子沟)의 집은 당분간 할머니가 지키기로 했다. 무슨 영문인지 큰아버지가 와서 집을 팔고 그리고 할머니를 모시고 유하(柳河)에 가버렸다. 하지만 일년도 안 되어 할머니는 유하로부터 도보로 반석에 아버지를 찾아오셨다.

할아버지가 너무 일찍 돌아가시고 만주에서 힘들게 세운 집이 영영 없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유산 대신 하씨 가보(家谱)만 기념으로 남기시고 가셨다.​

아버지는 얼따오땐즈(二道甸子)에서 농회주석으로, 어머니는 부녀회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들은 토목 개조작업과 전방지원 사업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때의 사람들은 순전히 대공무사(大公无私)했고, 자기를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 외에는 보수도 댓가도 없었다. 아버지는 가난 때문에 어려서부터 학당에 가서 공부할 기회가 없어 마음에 한이 있었다. 지금 자신이 마을의 일을 맡아하게 되자 바로 학교를 설립하여 모든 마을 아이들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려했다. 애석하게도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일밖에 모르다보니 아무도 도와주려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밭농사를 하면서 땅을 평평하게 고르는 것부터 흙벽돌과 바닥을 만들고 산에 올라 돌을 채취하고, 벌목하고, 소달구지로 실어 오셨다. 돌로 지반을 다지고 흙벽돌을 쌓기 시작하고 낡은 나무로 문과 창문을 만들고 설치하는 등 피땀을 흘렸고, 긴 몇 채의 집들은 이미 규모를 갖추었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을 감동시키니, 그들은 끝내 아버지에 탄복하며 도와주기 위해 나오기 시작했다. 보를 올리고 지붕도 올리고 우물도 파고 책상도 만들고 의자도 만들고 농구 골대도 세웠다.

기숙사를 짓고 주방까지 만들었다. 이렇게 학교가 만들어지자 아버지는 정부를 통해 선생님을 모셔왔다.

이렇게 아버지의 피땀 흘린 노력 덕분에 아이들은 학교에 다닐 수가 있었다.

내가 5~6세 때 한 무리의 어린이들을 따라 학교 남쪽 큰 구덩이, 저수지 등에서 수영을 하며 놀던 기억이 난다. 그 구덩이는 깊이가 3미터이고 축구장 반 정도 된다. 학교는 바로 여기에서 한삽 한삽을 파서 나의 아버지의 두 손으로 쌓아 올린 것이다. 몇십년이 지났지만, 얼따오땐즈(二道甸子)조선족 초등학교는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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