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어머니의 추석
기고/ 어머니의 추석
  • 김인희 (시인,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9.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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影園 김인희 (시인, 칼럼니스트)
김인희 시인
김인희 시인

[시정일보] 쪽빛 하늘이 눈부시다. 길을 걷다가 발에 차이는 돌멩이 하나 주워 힘껏 던지면 쪽물이 주르륵 쏟아질 것만 같다. 그 물이 온몸을 적시고 파랗게 변하면 스머프라고 할 테지...

한가위 추석 명절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했던 풍성하고 정겨운 미풍이 흔들리고 있다.

코로나-19는 여전히 꺾일 기세가 없다. 코로나의 위력은 가히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까이할 수 없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하고 그리운 사람 만날 수 없고 보고 싶은 얼굴 볼 수 없게 하고 있으니. 가슴에 차오르는 미움과 원망 한가득 코로나를 향해 던진다.

추석은 온통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동반한다. 유년시절 어머니를 생각하면 농부의 아낙으로 호미 들고 산비탈 밭을 달려 다녔다. 콩밭 김매기가 끝나면 고추밭으로 옮겨 앉아야 했던 고단한 일상이었다. 소나기가 지나가는 한여름에는 감나무 아래에서 반짝 비를 피했다. 소나기 그친 후 하늘에 무지개가 피어나면 ‘무지개 봐라. 어쩜 저리 색이 고운지!’ 외마디 탄성을 지를 뿐 어머니의 호미질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분주한 일상이 추석 명절이 다가오면 배로 바빠졌다. 청양 오일장 다니면서 명절 지낼 준비를 하고 밭으로 논으로 일손을 보태면서 집안일을 했다. 어머니의 명절 맞이는 해마다 추석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의식처럼 지켰다.

창호지 문을 문틀에서 떼어내어 마당 둘레에 병풍처럼 세워두고 물을 뿌려서 헌 창호지를 뜯어낸다. 창호지를 벗긴 문짝은 앙상한 뼈마디만 남아 마치 벌거벗은 모습이었다. 나신이 된 문짝에 밀가루 풀을 쑤어 새 창호지를 바르면 가을 햇살을 받아 흰색이 파르라니 눈부시게 빛났다. 빨간 고추잠자리가 뱅뱅 맴돌면 쪽빛 하늘과 흰 창호지와 황톳빛 마당은 아름다운 원색의 하모니를 연출했다.

어머니께서 청양 장을 다녀오시면 뒤꼍에 있는 커다란 항아리는 배가 불러온다. 그 항아리 뚜껑을 열어본 것은 순전히 단내 나는 향기 때문이었다. 항아리 안에는 빨간 사과가 가득 들어있었고 황토색 삼각 모양 종이로 싼 황색 설탕이 있었다. 어머니 몰래 동생과 날마다 사과를 하나씩 꺼내 먹었다. 며칠 지나자 배부른 항아리 배가 쏙 들어갔다. 어머니께서 항아리를 확인하고 ‘우리 집에 고망쥐가 있나 보다. 항아리 안에 넣어둔 사과가 없어졌네.’ 하면서 다시 청양 장에 다녀오셨다.

어머니는 명절 전에 이불을 모두 세탁했다. 우리 안마당 빨랫줄에는 이불이 가득 널려 있고 마당 가로 창호지 문이 햇살을 받아 안고 있었다. 그 사이를 두 팔 벌려 고추잠자리처럼 뛰어다니면서 마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내가 명절 전에 이부자리를 세탁하는 버릇은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유전자임에 틀림없다.

어머니께서 무지개떡을 할 때 옆에서 구경하는 재미가 솔솔 했다. 함지박을 색깔 수대로 준비한 후 흰 쌀가루를 같은 양으로 나누어 담는다. 흰 쌀가루를 담은 함지박에 분홍색, 초록색, 노란색 색소를 조금씩 넣는다. 그때 어린 나는 ‘에게~~ 그렇게 쪼금 넣으면 많은 쌀을 어떻게 물들일 수 있어요.’하고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웃으면서 ‘조금만 더 기다려 봐라. 어떻게 변하는지...’하고 쌀가루와 색소를 손으로 골고루 썩으면서 자꾸 비볐다.

흰 쌀가루는 마법같이 분홍색으로 초록색으로 노란색으로 변했다. 그 쌀가루를 시루에 작은 바가지로 조금씩 덜어서 켜켜이 펴서 색색으로 쌓았다. 흰색 쌀가루 위에 분홍색 쌀가루, 그 위에 초록색과 노란색 쌀가루를 올리고 다시 도돌이표처럼 반복해서 쌀가루를 켜켜이 쌓았다. 시루에 쪄낸 무지개떡은 소나기 지난 후 하늘에 피어났던 무지개색과 다르지 않았다.

가끔 떡집을 지나다가 무지개떡이 진열되어 있으면 외면하지 못하고 들어가서 사게 된다. 무지개떡은 고운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다. 무지개떡을 먹을 때마다 잔소리처럼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뱉었다. 내 말을 흘려듣지 못한 예쁜 딸이 무지개떡을 사 올 때가 잦다.

어머니의 지극 정성은 마치 신앙과도 같았다. 육 남매 기르면서 한시도 쉴 날 없었던 농부의 아낙이었지만 ‘부모의 말은 문서란다. 이 다음에 아이를 낳아 기를 때 말을 조심해야 한다. 부모가 말하는 대로 된단다.’ 하시면서 말과 행동을 조심하셨다.

그 어머니의 유전자가 우리 남매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져 오고 있다. 남매들이 집안 행사 때 만나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르침을 되뇌면서 재현하고 있다. 참으로 위대한 유산을 주셨다.

어머니께서 유난히 좋아하셨던 가을이다. 시간이 시나브로 흐르고 찬 바람이 선홍빛 과꽃을 피울 때쯤이면 바르르 전율하리라! 산처럼 큰 그리움 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