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마저 전통이 사라져 가다
농촌마저 전통이 사라져 가다
  • 임채규(나주임씨 대종중 도유사)
  • 승인 2022.12.05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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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규 | 나주임씨 대종중 도유사
임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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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 노령산맥이 서남쪽으로 내려와 나주에 이르러 진산(鎭山)인 금성산(錦城山)을 이루고 그 줄기가 신걸산(信傑山) 백룡산(白龍山)이 되었다. 필자는 백룡산 끝자락 시골 깡촌 산골 마을 복용(伏龍)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다. 내가 어렸을 적엔 조상이 나시고 자란 혈족 사회인 이 고장에서 3세대 대가족이 함께 살았다.

작은 산들로 둘러싸인 마을에 같은 성씨들이 70% 정도였고 다른 성씨들은 이방인처럼 살았다. 할머니와 어머니,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작은집 사촌 7남매가 한집에서 왁자지껄 지낼 때는 하루가 어찌 지나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지난 9월 10일 추석을 맞아 내가 태어난 고향을 찾았다. 내 고장 나주는 무지갯빛보다 더 아름다운 색을 피우는 찬란한 곳, 내 탯줄을 묻어둔 생명의 땅이라는 것이 참으로 감격스럽기만 하다.

지금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곳곳에서 생활 터전을 잡고 있으면서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어머니가 안 계신 그곳에 이제 더는 내려갈 이유가 없게 된 것이 왜 그리 가슴을 시리게 하는 것일까?

사업상 바쁘다는 핑계일까? 내가 살던 정겨운 추억이 점점 멀어져만 가고 내 나이 팔순! 세월이 흐를수록 더더욱 안타깝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간절하다.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전통적인 가족 구조도 대대적인 변화를 겪었다. 60년대 이래 본격화된 가족계획은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가족계획을 성공한 국가로 만들었지만 이 과정에서 유행하게 된 소위 ‘아들 한 명, 딸 한 명 낳기 운동’은 과거의 친족 개념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과거에 독자(獨子)는 특별한 관리 대상으로 국방의 의무인 군대도 면제 대상이었다. 지금은 독자가 일반화된 현실이 되었다. 형제가 희귀하니 자연히 아버지의 형제인 삼촌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고모나 이모의 존재도 드물어가고 있다.

당연히 과거식의 친족 관계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가족제도에 혁명적인 변화가 도래한 것이다. 산업사회의 도래는 농촌의 쇠퇴와 가족 구조의 변화 외에 인류문명의 주요 특정인 문명의 전승 기능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이 다른 동물의 생활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전승과 축적기능에서이다. 다른 동물들은 먹고 자는 행위와 종족을 번식하는 본능적인 기능만을 반복하며 생활한다.

소위 문명적 축적기능이 결여되고 있다. 그 결과 동물들의 삶의 형태는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다. 반면에 인간은 앞 세대에서 이룩한 것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고, 다음 세대는 거기에 알파를 플러스하여 또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형태로 문명을 발달시킨다. 문명의 발달은 곧 전수와 축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이래 인류문명의 전승 과정에서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였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홉스 봄(1917~2012)의 말을 빌리면 20세기 문명의 특징 중 하나는 ‘전통의 단절’이다.

오래된 유형의 사회적 관계들이 해체되고, 그와 더불어 세대 간의 연결 고리 즉 과거와 현재 사이의 연결 고리가 끊겨가고 있다. 과학과 기술은 계속 발달하고 있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 전통의 단절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세대 간의 단절 현상은 이런 현상을 가중시키고 있다.

우리나라는 60년대 이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여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성공적으로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성과를 이룩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매우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환경오염 같은 문제 외에도 정신적 측면에서 우리 것을 너무 많이 소실하였다. 그 정신적인 가치의 소실 중 한 예가 바로 꼭 보존해야 할 전통의 소실이다.

과거 전통을 모두 보전할 수는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지만 우리 사회의 정체성에 해당하는 혹은 서구 문명과 비교하여 우위를 차지하는, 그래서 꼭 보전해야 할 그런 전통까지도 서구화의 물결에 휩쓸려 대부분 사라져 버리고 있다. 이런 현상을 초래한 주요 배경 중의 하나가 바로 세대 간의 단절 현상이다.

이런 제반 사정을 감안할 때 얼마 전에 있었던 추석 명절은 단절되어 가는 세대 간의 단절, 농촌과 도시 간의 단절 문화를 조금이나마 복원시키는 귀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잘 알다시피 1년에 두 번씩 도래하는 민족 대이동은 사업화 결과 떨어져 살게 된 도시인들의 농촌 찾기 행렬이고, 자식들의 부모 문안드리기 행렬이다.

민족 대이동은 텅 빈 농촌 마을에 모처럼 사람들을 북적거리게 만들고, 아이가 살지 않은 마을에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기회를 제공한다.

‘자가 양로원’으로 일컬어지는 부모님의 집에서 노, 장, 청이 함께 모인 잔치가 펼쳐지고, 직장 일에 바쁜 형제자매가 모두 만나 서먹서먹한 사촌과 친지들이 서로 얼굴을 익히고 한 뿌리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상님을 위해 준비된 차례상은 일반 대중들로 하여금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음식을 보존하고 계승하게 하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해 준다.

제사 때와 명절 때가 아니면 일반 가정에서 언제 전통적인 음식을 만들어 먹을 기회가 있는가. 대장금에서 소개되는 궁중요리는 실제로는 거의 사라져버렸다고 할 수 있고, 마지막으로 명절과 제사상 등을 통해 우리의 전통 요리가 희미하게나마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민속놀이의 경우도 그렇다. 명절이 있음으로써 그런 풍속이 조금이나마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명절 때나 결혼식 때 즐겨 입은 한복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명절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처럼 주부들은 명절 때면 차례상을 차리고 손님 접대하느라 지쳐버리곤 한다.

명절 때 고향을 찾아가는 가족들은 수 시간 동안 운전하거나 차 안에서 갇혀 고생을 많이 한다. 젊은 세대들은 허름한 시골집에서 잠을 자고 생소한 친지들을 만나느라 많이 불편하고 낯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를 위해 의미 있는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2022년 9월 5일 성균관정립위원회가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차례 간소화’ 방안을 발표했다. 성균관이 이날 공개한 표준안에 따르면 추석 차례상의 기본 음식은 송편, 나물, 구이(적(炙)), 김치, 과일, 술 등 6가지다. 여기에 더 올린다면 육류, 생선, 떡을 놓을 수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최영갑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 위원장은 “명절만 되면 ‘명절 증후군’과 ‘남녀차별’이라는 용어가 난무했다.”라며 “이번 추석 차례상 표준안 발표가 세대갈등을 해결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런 기회가 있음으로 해서 도시와 농촌 간의, 부모와 자식 간의 단절이 조금이나마 완화되고, 그래서 우리 사회가 좀 더 화기애애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전통의 유지기능을 수행하는 명절 모습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겠다. 왜냐면 농촌 인구는 물론이요, 농촌에 거주하는 노인 인구의 급격한 감소와 더불어 혹은 도시 중심의 명절 지내기 풍조에 따라 명절 때 농촌을 찾는 도시인들의 행렬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금년 추석에 서울에서 광주까지 이동할 때 걸린 시간이 전보다 크게 줄어들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반가운 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쓸쓸한 일이기도 하다.

반갑다는 것은 교통 사정이 개선되어 소요시간이 크게 줄어들고 그 결과 농촌을 찾는 친지들의 불편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좋은 징조든 쓸쓸한 징조든 이 모든 현상이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전통의 전승과 축적이라는 인류문명의 특징 자체가 사라져서는 안 된다. 가치 있는 전통의 보존을 위한 특단의 대안이 모색되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