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한유에서 깨달음을 얻다
인문학 산책/ 한유에서 깨달음을 얻다
  • 임재근 전 합천 부군수
  • 승인 2022.12.19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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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근 | 전 합천 부군수, 시인
전 합천 부군수
전 합천 부군수

[시정일보] 누가 내게 요즘 뭘 하고 지내냐 물으면 나는 딱히 뭐라 답하기가 난감하다. 거의 매일 등산 아니면 파크 골프장(대원, 호계, 대산)을 찾아 동호인들과 골프를 즐기는 일, 또 간간이 경남도행정동우회에 나가 선후배들과 한담으로 시간을 보내는 일 아니면 아내가 병원이나 시내에 나갈 때 차를 태워 주는 일, 이게 내 일상이다 보니 시쳇말로 장로(長老, 놀고먹는 사람)라 하면 어떨까 싶다.

요즘은 집 근처에 있는 작대산(爵大山)을 자주 찾는 편이다. 이러다 보니 이제 이 산이 내 생활의 터전이 되고 있다. 작대산은 진달래 축제로 알려진 천주산(天柱山, 640m)의 연봉으로 해발 648m나 되는 제법 높은 산이다.

수년 전 창원시가 건설한 감계 신도시 주산이지만, 아직 등산로도 제대로 정비 안 된 가파른 악산(惡山)이다 보니 신발 끈을 졸라매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가 십상이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 올라도 땀이 샘솟듯 하고 숨이 꽉꽉 막히지만, 그래도 울창한 숲들이 내뿜는 산 향이 너무나 상쾌해 시민들이 자주 찾게 되고 나 또한 이 산을 벗 삼아 나름 노후의 건강을 지켜가고 있다.

입춘이 지났다지만 아직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꽤 쌀쌀한 날씨인데 양지바른 길가 언덕배기엔 진달래가 예쁘게도 피어 무뎌진 내 감성을 일깨운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언제 또 아카시아는 우윳빛 꽃잎을 허들스리도 피워 향긋한 그 향이 산야를 적시더니 어느새 시샘하는 비바람에 꽃비 되어 쏟아 내리고 연초록 여린 잎들은 푸르른 숲이 되어 파도처럼 출렁이며 여름을 손짓한다.

이른 아침 산에 오르면 새벽이슬에 흠뻑 젖은 웃자란 잡초가 갈 길을 막아 바지를 적시곤 하는데, 어쩐지 오늘은 길이 훤히 닦여 있어 기분 좋게 등산을 했다. 이른 공덕을 누가 지었을까, 칠십 중반의 어눌한 노인분이란다.

아니, 자기 몸 가누기도 급급한 노인이 이 조악(粗惡)한 산길을 계단까지 만들어 보시하다니 불심의 발로인가? 생각이 이에 미치자 사지육신이 멀쩡한 나는 남을 위해 뭐 하나 한 일이 있느냐는 물음 앞에 그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고 보면 편안한 사람들이 불평불만 일삼고 남 탓하는 경향이 강하지 정작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은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긍정적 사고로 사는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어느새 산 정상에 올랐다.

심호흡 크게 하고 땀을 식히다가 맞은편 잔디밭에 벌렁 누워 높은 하늘을 쳐다본다. 초록의 나뭇잎 사이사이로 햇빛이 쨍하고 빨려 들어온다. 산새들 노랫소리가 정겹다.

비비비 찍찍찍 짹짹짹 휘익휘익 뻐꾹뻐꾹 저 건너 산에서 들려오는 뻐꾸기의 한스런 울음까지, 지그시 눈을 감고 귀 기울여 새들의 이름을 떠올리다 깊은 상념에 잠긴다.

지난 세월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흐릿하게 떠오른다. 일곱 살쯤이었나 병석에 누워 계신 할머니가 마당에서 놀고 있는 나를 애써 불러 드시던 명탯국을 기어이 내게 먹이며 “재근아, 너는 우리 집 장손이다. 장차 큰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시며 임종을 눈앞에 두고도 나를 그렇게 애지중지하시다 그길로 운명하신 경주최씨 우리 할머니, 내 나이 열 살 때 네 살 된 남동생이 배탈이 나자 약물(아편) 오용으로 졸지에 아들을 잃고 망연자실 통곡하시던 우리 어머니 모습, 순조롭지 않았던 학창 시절의 고충, 스무 살도 채 안 된 나약한 몸으로 군에 자원입대해 7월의 뙤약볕 아래 훈련받다 배탈이 나 무진 고생한 논산훈련소 생활, 34개월 만기제대를 하고 집에서 빈둥거리다 부모님 뜻을 존중, 중매결혼을 하고 철부지 사랑을 키우며 4대가 오순도순 살아온 단란했던 그 시절, 혁명정부의 공채시험으로 공직에 발을 들여 반평생을 선공후사(先公後私)로 임하면서 충성, 헌신, 정직, 봉사, 책임, 신뢰, 청렴, 성실, 사명, 의무, 책임, 감사, 영전, 승진, 명예, 창의성, 전문성, 공익우선, 법령준수 등등 내 뇌리에 각인된 단어들, 마치 교도소 담장을 타듯 긴장하며 살아온 공직 38년의 애환, 자식 효도는 못 받으셔도 천수를 누리시고 우리 집 안방에서 운명하실 때 어머니, 아버지의 평화스러워 보이던 임종 시 얼굴 그리고 생의 ⅔를 창원에서 살아 제2의 고향이 된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며 노쇠해 가는 내 모습 등등 생각이 줄을 잇는다.

내 생에 남은 것이 있다면 그게 뭘까? 나라에서 받은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부처장관 표창 몇 개, 지방부이사관이라는 직함 그리고 변두리 아파트 한 채, 이게 내 삶의 전부인 것 같아 찝찝한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크게 잃은 것도, 크게 얻은 것도 없는 것 같다.

그래도 큰 탈 없이 공직을 마무리할 수 있었음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앞으로 살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아버지께서 여든일곱에 세상을 뜨셨으니 90을 산다 해도 한 7년 정도.

오늘도 작대산을 오르다 너럭바위에 앉아 명상에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눈을 떠보니 바로 앞 소나무에 청개구리 두 마리가 나를 빤히 보고 있다. 나도 무심히 바라보다 어릴 적 철없던 행동이 불현듯 떠오른다.

감나무에 붙어있는 청개구리를 보이는 대로 잡아 짚나라미를 똥구멍에 꽂아 입으로 바람을 힘껏 불어 넣고 누구 것이 더 배가 볼록한지를 동무와 겨루고 했던 짓들을…. 이제 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그래도 정성 들여 속죄를 빌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35년 전쯤인가 양산 통도사에 행운을 준다는 ’금 청개구리‘가 있다기에 나도 한번 가 보았다. 경내를 둘러보고 뒤뜰로 돌아드니 우람한 바위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바위 배꼽쯤에 눕혀놓은 병(甁)처럼 깊이 파인 구멍이 하나 있는데, 그 구멍 안에 살고 있는 신령하다는 금 청개구리를 보러 온 이들이다. 나도 그 뒤에 섰다.

불심 없이는 볼 수 없다는 이 영험(靈驗)한 금 청개구리. 행운이 저마다 자신에게 올 것이라 믿어 사람마다 그 구멍 안을 숨죽여 들여다본다. 나도 그랬다.

한참을 봐도 보이지를 않아 그만 눈을 떼려는데, 그때 청개구리의 동그란 눈이 내 눈과 마주치질 않는가. 나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가족의 안녕과 소원 성취를. 그러고는 뭐든 잘 될 것만 같은 행복감에 젖어 귀가한 적이 있다.

그런데 오늘 또 우연히 청개구리를 보게 되다니 이제 세 번째이다. 하도 신기해 한참을 보고 있자니 지도 나를 의식한 듯 배를 나무에 바싹 붙인 채 한동안 동그란 두 눈으로 나를 주시하다 경계를 풀었음인지 살금살금 나무를 기어오른다. 내 명상(冥想)의 기도(祈禱)가 통했나?

문득 어릴 때 어머니가 자주 들려주신 청개구리 얘기가 생각났다. 생전에 엄마 청개구리 말을 거꾸로만 듣던 아들 청개구리가 나 죽으면 개울가에 묻어달라는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은 똑바로 들어 어머니를 개울가에 묻은 바람에 비만 오면 엄마의 무덤이 떠내려갈까 저리도 설피 운다고 하시며.

사람이나 짐승이나 청개구리 같은 미물(微物)도 부모 된 자는 언제나 자식에게 유익한 말을 하고 자식 잘되기만을 바란다. “아들아, 너도 엄마, 아빠 말씀 잘 듣고 착하고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귀에 거슬리도록 일러 주셨던 우리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살아생전 제주도 구경 한 번 못 시켜 드리고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불효자인 내가 어언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 소리를 들으며 산 지가 벌써 30년이 된다.

손주들이 취직하고 결혼하고 독립을 해서 사람답게 잘 살아야 할 터인데 정치가 어지럽고 경제가 어려워지고 청년 실업률이 높다고들 하니 걱정이다.

물오른 오월의 청록색 나뭇잎 사이로 내리비치는 햇빛이 해맑다. 날렵한 청설모의 배웅 받으며 산길을 내려오는 발걸음도 가볍다. 청개구리도 불효를 후회하고 비가 오면 저리도 슬피 우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어떤가.

TV만 켜면 등장하는 비인륜적 사건들을 심심찮게 접하면서 인륜을 저버린 흉측한 망동을 예사로이 보고 넘기는 작금의 사회현상 앞에 우리는 양심에 찔려 고개를 돌릴 때가 있다.

주자(朱子) 십회훈(十悔訓)에 ‘불효부모사후회(不孝父母死後悔)’란 구절이 있다. 부모님 생전에 효도하지 않고 돌아가신 후 후회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

공자(孔子)는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하고 자욕양이친부대(子欲養而親不待)’라 하였다. 나무는 고요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멈추지 아니하고 자식은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이 가르침은 2,5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불변의 진리이다. 필자는 어렴풋이나마 이를 깨우치는 데 80년이 걸렸다.

5년 전에 집을 이사와 거실에 놓아둘 화분을 사러 화원에 갔을 때 우연히 화강석을 잘 다듬어 황금색을 입혀 만든 황금두꺼비 한 마리가 내 눈에 들어와 청개구리에 대한 연민도 있고 우리 민속에 집을 지키고 복을 불러주는 재복(財福)의 상징으로도 여긴다기에 화분과 같이 사서 와 어머니 생전에 아껴 쓰시던 다듬잇돌을 좌대로 삼아 거실에 정중히 모셔두고 있다.

나도 이제 황혼에 접어드니 한유(閒遊)에서 깨달음을 얻게 되고 무상無常) 속에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된다. 얼마나 오래 살지는 알 수 없지만 얼마나 보람되게 살지는 선택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여생이 늘 좋은 마음, 좋은 일, 좋은 날이 되기를 염원하며 하심(下心)으로 살아가리라 마음 다잡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