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장애의 경계를 허무는 것은 용기다
인문학 산책/ 장애의 경계를 허무는 것은 용기다
  • 임정희(재독 EU 정간호사)
  • 승인 2022.12.26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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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희┃재독 EU 정간호사
임정희
임정희

[시정일보] 우리 부부는 2017년 3월에 제주도 여행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친정 7남매 형제 중 4남매 부부가 함께한 너무나도 아름다운 추억여행이었다.

나머지 3남매는 해외 거주나 직장 일로 함께하지 못했다. 나는 매해 꼭 한국을 방문하며 고국과의 끈을 놓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여행이 우리가 한국에서 함께하는 마지막 여행이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리 4남매는 합숙하며 걷기 등 등반 여행을 했다. 3월 말이었지만 한라산에는 비가 오고 바람이 심하게 불어 몹시 추웠다. 정상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한라산 계단을 내려오며 알게 된 사실! 남편의 다리에 힘이 빠져 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은 옆에서 형제들이 붙들어주지 않았더라면 넘어졌을 것이다.

이후 검진으로 알게 된 병명은 ‘중증 근육 쇠약증’이었다. 자가면역 병증세의 하나이다. 남편이 이 병을 앓고 있음을 그해 가을 신경과와 안과 의사의 진단을 받고 알게 되었다.

증상은 눈의 근육이 쳐져서 앞을 볼 수 없었고 목의 고개 근육도 약하여 앞으로 머리가 숙여서 들지 못하였고 허리에 통증도 심했다. 남편의 나이 75세 되던 해였다.

진단이 내리자 약물치료를 시작하였으며 얼마 후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눈의 근육도 정상으로 돌아와 거의 회복한 것으로 여겨졌다. 근육 쇠약증이 회복되자 다른 장애 현상이 이어 나타났다.

소변이 자주 마려워서 거의 30분 간격으로 화장실을 찾아야 했다. 그동안 전립선비대증으로 몇 년간 약물치료를 받았는데 이젠 더욱 심해져서 별개의 치료가 필요한 상태가 되었다.

의사는 2018년 6월 25일에 수술을 하자고 했다. 의사의 말로 전립선이 커져서 요도를 막아 정상기능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니 수술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후유증도 없으리라고 했다. 그러나 수술 후 남편은 마취 후유증으로 약 7일간 정신착란상태에 빠져서 다른 세계에 있었다.

중증 근육 쇠약증에는 마취 전에 미리 주는 신경안정제가 금물이었다. 마취과 의사는 신경안정제 없이 마취했노라고 했다. 그러나 후유증은 심각한 상태였다.

안타까운 일은 남편의 기억력이 상당히 떨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전립선 수술 후유증으로 자주 방광염이 있었고 그때마다 항생제 약물치료가 필요했다.

그보다 더 황당한 일은 일 년 동안이나 꾸준히 시도한 방광 기능회복 치료의 효과가 한치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남편은 100% 요실금 환자가 되었고 극복의 방법으로 날마다 요실금 환자용 팬티를 약 4시간 간격으로 바꿔 입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은 근육 쇠약증으로 방광의 요도를 닫는 괄약근의 기능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회복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결론적으로 님편은 이제부터 살아있는 동안 내내 요실금 환자용 팬티를 입고 살아야 한다.

근육 쇠약증과 일 년 후 남편의 자세가 앞으로 굽어지고 걸음걸이도 느려졌으며 말도 모노톤으로 변하고 치매 증상도 더 심해졌다. 다시 신경과 의사를 찾았고 DatScan 검진을 통하여 파킨슨병이라는 진단이 확진되었다.

바로 약물치료를 시작하였지만, 파킨슨 증상이 정상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느리지만 걸을 수 있고 일상생활에 별 지장이 없었다. 요실금 팬티 갈아주고 샤워시켜 주고 옷 입혀 주는 등 그 외에 규칙적으로 약을 주는 것이 내 몫이다.

거동장애와 치매 장애는 장거리 여행이나 해외여행을 하는데 하나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두려운 것은 여행 중 예상치 못한 비상상태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용기는 장애를 극복하는 가능성이었다. 2021년 9월에 6일간의 오스트리아 여행을 갔었고, 2022년 4월에는 자동차로 네덜란드의 섬, 텍셀을 다녀왔다.

남편이 건강했을 때는 번갈아서 운전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혼자 운전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마음을 단단히 먹고 쉬어가며 운전하기로 했다. 감사하게도 편도 6시간의 장거리를 허리도 아프지 않고 잘 갔다 왔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장애가 아니라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이다.’라는 글을 보았다. 2020년 초부터는 코로나로 인하여 온 세계가 발이 묶여 제자리걸음을 해야 했다.

이 사실이 해외여행을 포기해야 했던 우리에게는 잘된 일이라고 여겨졌다. 이젠 장애인 남편과 여행을 안 해도 되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이상한 현상이었다. 온 세상이 락다운 되니 얼마나 좋은가.

온 세상 사람들이 우리처럼 집에 갇혀 있으니 부러운 사람도 없었다. 이것은 ‘정신적 장애가 온 사람이 느끼는 현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6년 10월에 퇴직하며 직장생활에서 벗어나서 마음대로 자유롭게 여행하며 사는 것을 상상했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이 그런 꿈을 접게 하였다.

화도 나고 짜증도 나며 남편에게 새로운 장애가 생길 때마다 함께 울었다. 장애인 남편을 돌보며 살아가야 하는 삶을 나의 사명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고통스러웠다. 몸과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어렵지만, 함께 해결할 수 있다. 용기 있는 사람에게만 장애의 극복이 가능하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파킨슨 자가 도움 그룹’ 만남의 장소에서 내게 다가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 온 여자분이 있었다. 딸 유디트를 통하여 나를 알고 있노라며 “당신 이름이 분명 정희지요? 반갑습니다! 그리고 9월에 이탈리아로 남편과 여행을 가려는데 함께 가고 싶으세요?”라고 물었다.

너무 반가운 질문이었다. 여행은 가고 싶었지만, 전혀 용기가 없었던 터라 함께 가겠노라고 곧바로 대답했다. 난 그녀의 딸 유디트를 피트니스에서 알게 되었고 그녀는 우리 남편의 건강 상태를 알아보고 파킨슨병에 걸린 남편을 간병하는 어머니 처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전해 주었다.

유디트는 지난 5월 어머니가 남편을 차에 태워 이탈리아까지 3주간 여행을 갔었노라고 얘기해 주었다. 난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알고 싶었다.

우리도 여행을 하고 싶지만, 용기가 없다는 것을 딸 유디트가 어머니 크리스타에게 전달한 것이다. 집에 와서 남편과 상의한 후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가는 방법을 얘기해 줬다. 남편이 걸을 수 없기에 로라토어와 이스쿠터를 가지고 가야 해서 자동차로 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휠체어는 여행지 약국에서 빌리기로 예약을 해놓았다고 한다.

남편은 느리다. 하지만 걸을 수 있다.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 크리스타의 남편은 지난 5월만 해도 걸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직 걸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여행사를 통하여 일정을 예약했다. 9월 5일부터 9월 26일까지 3주간 이탈리아 해변으로 떠나기로 했다. 쾰른, 본 공항에서 베니스까지는 비행기로, 나머지 80km는 기차로, 호텔까지는 택시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요실금 팬티가 매일 5개 정도 필요했다. 일주일에 35개 3주면 120개 정도가 필요했고 한 박스에 10개 들어있으니 12박스가 필요했다.

비행기로 가져갈 수가 없는 양이었다. 크리스타와 의논한 결과 여행지의 약국에 전화로 주문을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우리를 위하여 곧바로 주문해 주었다.

나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마음의 부담을 이렇게 쉽게 덜 수 있다니!!! 너무나 감사했다. 집에서 공항까지 어떻게 가느냐가 문제로 느껴졌다.

느린 걸음에 무거운 짐을 들고 기차역까지 또 셔틀버스로 공항까지 가는 것이 과제로 남아 있었다. 이 사실을 딸에게 얘기했고 딸은 쉽게 해결해 주었다.

자기가 일요일에 우리 집에 와서 자고 월요일 아침 일찍 우리를 공항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것이었다. 난 이 경험을 통하여 어렵고 힘든 일도 함께라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크리스타를 보며 용기를 배웠다. 문제를 해결하며 뇌에서 세로토닌의 분비를 느끼는 현상이 일어남을 경험했다. 흥분과 함께 행복감, 감사가 마음속 깊이까지 느껴졌다.

온 세상을 껴안을 수 있었다. 크리스타는 내게 “우리 장애인 남편들이 살아있는 동안 우린 여행을 합시다.”하고 말했다. “언제가 마지막일지 모르니까!”라고 덧붙였다.

독일 쾰른공항에서 베니스 마르코폴로 공항까지는 1시간 40분 걸렸다. 공항에서 내려 산타 루치아 역전까지는 택시로 갔다. 마르코폴로 공항에서 라티싸나 역전까지 택시에서 내려 산타루치아 역전을 향해 걸었다.

그러나 문제는 계단으로 만들어진 사닥다리를 건너야 했다. 거의 20kg의 무거운 가방을 들고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우리 부부가 어처구니가 없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널 같은 수레를 미는 젊은이가 나타났다.

그리고는 가방을 싣고 계단을 하나씩 바퀴로 굴리며 올라갔고 내림 계단도 문제없이 내려갔다. 우리를 기차표 매표소까지 데려다주었다. 운반비는 10유로였다.

기차표를 사기 위해 자동 티켓 마트 앞에 서 있는데 서비스 요원이 다가왔다.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으니 친절하게 “예스!”라고 하였고 그의 도움으로 쉽게 리턴 티켓을 샀다.

기차가 출발하는 플랫폼으로 가서 바로 기차를 타니 라티싸나 역을 향해 달렸다. 라티싸나까지는 약 1시간 7분 걸렸다. 라티싸나에 도착하자 바로 나오는 길에 택시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고 30분 후에 비비오네에 있는 암바싸도르 호텔에 도착했다.

오후 4시경이었다. 방 배치를 받고 짐을 풀고 있는데 4일 먼저 도착한 크리스타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린 호텔에 머무는 동안 조반만 먹고 점심과 저녁은 우리 스스로 해결하기로 했다.

다행히 크리스타와 균터가 아파트먼트를 부킹한 고로 음식을 해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크라스타가 피자를 주문했고 덕분에 쉽게 저녁을 먹었다.

우리가 먹은 음식은 우리가 담당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이제 우리의 3주 여행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날마다 비슷한 하루 같지만, 해변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다르다.

크리스타의 사랑과 남편을 간병하는 모습을 보며 많이 배운다. 우리는 저녁 시간에 음식을 나누면서 대화로 시간을 보냈다. 3주 중 딱 하루 비가 왔고, 그날 부부들은 아파트먼트에 가서 게임을 했다.

굳어진 남편들의 손가락 펴는 운동이었다. 게임 이름은 ‘짜증 내지 않기’였다. 다른 사람이 나의 게임 팀메이트를 내보내도 화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두 번 이 게임을 했다.

운명을 같이한 장애인들이 함께 힘을 합하면 외롭지 않고 힘든 여행도 해낼 수 있다는 경험은 다음 계단을 쉽게 오를 수 있게 한다. 모든 고난에는 숨겨진 의미가 있고 우리를 더욱 성숙한 인간으로 전진하게 하는 힘이 숨겨져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