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인문학산책/ 인생 후반을 어떻게 살 것인가
시정인문학산책/ 인생 후반을 어떻게 살 것인가
  • 임수홍(한국국보문학 발행인)
  • 승인 2023.01.18 09:52
  • 댓글 0

임수홍(한국국보문학 발행인, 시인)
임수홍
임수홍

[시정일보] 나이를 먹어가면서 50대 이후의 직장인이 느끼는 가장 큰 두려움은 자신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의 길로 접어든다는 것이다. 영어에서 ‘은퇴(retire)’라는 말은 ‘물러간다.’라는 뜻이 아니라, ‘타이어를 다시 끼운다.’라는 의미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한다는 것이므로 ‘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희망의 메시지인 것이다.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 중에 일류대학을 나와 대기업을 다니던 친구가 술 한잔하러 사무실에 놀러 왔다. “친구야, 나는 끝났다 끝났어.” 술에 취해 허기진 목소리로 울분에 휩싸이다가도 멍하니 허공에 담배 연기를 내뿜는 녀석.

그리고 자신이 냉혹한 동물사육장에서 지금까지 남에게 먹히지 않고 살아온 이야기를 누에고치가 실을 뽑든 담담하게 나에게 이야기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요즘 시대에 필요한 갑옷으로 무장한 젊은이들에게 자꾸만 밀리는 자신.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새벽부터 컴퓨터 강좌랑 영어 회화까지 시간과 정력을 투자했지만, 결국은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단다. 회사에서 그동안 중요한 업무를 맡아 최선을 다했지만, 회사에서 갈수록 효용 가치가 떨어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결국은 명예퇴직을 선택했단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케이블TV 회사 사장인 밥 버포드(Bob Bufford)는 『하프타임』이라는 저서에서 인생을 축구경기에 비유했다. 인생은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누구나 인생의 전반부에는 성공을 추구하지만, 후반부에는 성공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빈자리를 발견하게 된단다.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할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또한, 전반전에서 성공했다고 하여 자기 인생이 반드시 성공적인 것은 아닐 수도 있단다.

전반전에서 골을 넣었다고 후반전에서 골을 지키는 데에만 급급해서는 도무지 신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전반전에 골을 잃었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다. 얼마든지 멋진 역전 드라마를 펼칠 수 있는 후반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인생은 마지막까지 다이내믹하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며칠 전,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계룡산에서의 하룻밤은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나에게 차분히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내가 살아온 이력을 잘 아는 친구가 자신이 대표로 있는 회사의 직원들 세미나에 특별강사로 초대하여 시간을 내어 참석하였었다.

강의가 끝난 후,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만나서 잔을 나누었고 긴 여로에 지친 사람들은 일찍 잠자리로 돌아갔지만, 우리 세대가 살아온 삶의 방식에 호기심 많은 젊은이와는 피곤함 없이 새벽 5시까지 담소를 나눈 것도 나에게는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지금 나이를 30여 년은 대패질하듯 억지로 깎아내려 젊은 시절의 친구들과 밤새는 줄 모르고 문학보다는 그 시절의 이슈였던 이념에 날 선 칼을 휘둘렀던 그때와 다름없는 오랜만에 내가 느끼는 행복한 새벽이었다.

계룡산은 흔히 봄 동학사, 가을 갑사로 불릴 만큼 이 두 절을 잇는 계곡과 능선 등 산세의 아름다움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산이다. 내가 1박 2일 동안 동학사 입구에서 머물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의 후반부에서 나에겐 행운이나 진배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유전인자가 없어서인지 도무지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성미다 보니 아침 여섯 시에 집에서 나와 별다른 약속이 없으면 밤늦게까지 사무실에서 일하는 지독한 일벌레인지라, 개인적으로 일상 속에서 어디를 간다는 계획은 꿈도 꾸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친구의 특별강의 초대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냥 그런 마음으로 동행하게 되었는데, 내 새로운 삶의 방향을 간단하게나마 스케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자연이 주는 맑은 공기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매에 자애로움을 듬뿍 안겨주고 있었다. 바쁜 삶 속에서 타인을 쳐다보는 눈매엔 감춰진 필살기가 감돌았는데, 동학사 입구에 드리워진 벚나무에서 뿜어내는 풍부한 광합성작용과 녹색이 주는 편안함 때문에 자연의 여유를 조금씩 배워가는 기분이 들었다.

더욱이 하루의 일과가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늘 반복되는 일상을 되풀이하는 나는 뭔가 어제와는 다른 내일을 꿈꾸며 살아가고 싶은 소망이 간절한데도 탁한 급류 속에서 정수된 물을 급히 찾으려는 어리석음을 자주 범하게 되는 이유가 뫼비우스의 띠(Möbius strip)처럼 과거의 삶이 내가 만들어 놓은 단단한 시간의 규칙들을 변화하도록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 일상이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계속 걸어간다면 결국은 원점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내 모르는 바 아니지만, 우리 세대가 걸어온 길은 열심히 땀 흘려 사는 것이 중요했던 시대였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하고 싶지만, 요즘 세태가 열심히 사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현명하게 사는 것이라 하니 나도 계룡산 입구에서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각오한 일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싶어진다.

그리하여 지금 아무리 바쁘더라도 호각을 불어 과감히 작전타임을 청해서 ‘내 인생의 후반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명제로 하여 내가 나이 든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재발견하는 가치를 스스로 깨달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