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9 진리와 정의를 위해 독배를 마시다
인문학 산책#9 진리와 정의를 위해 독배를 마시다
  • 현외성(경남평생교육연구원장)
  • 승인 2023.02.02 09:27
  • 댓글 0

현외성(경남평생교육연구원장, 사회복지학 박사)
현외성 연구원장
현외성 연구원장

[시정일보] “플라톤 이후의 모든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다.”라고 화이트 헤드가 말하였는데, 이 말은 플라톤 이후 현대까지 발전해온 서양 철학의 근원이 플라톤의 철학이라는 말이며 동시에 현대철학의 여러 가지 철학적 탐구 역시 이미 플라톤의 철학 속에 그 연원이 담겨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말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2,500년 전의 플라톤의 철학이 서양 철학의 기초가 된다는 의미는 충분하다. 다른 한편 이 말은 현대와 유사하게 우리들이 고민하고 해결하려고 하는 인생과 사회의 진리와 문제를, 그리스 사회에서도 그대로 안고 씨름하고 있었으며, 당시의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높은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만큼 사람들의 성장과 변화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쟁점이 되는 사건과 논란 중에 ‘정인이 사건’과 ‘공익제보자’의 토로가 생각난다. 전자는 건강하고 일반적인 우리나라의 젊은 가정에서 유아를 입양 후 학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쇼킹한 사건이라면, 후자는 ‘김학의 불법 출금 수사’를 둘러싼 논의와 관련한 ‘공익제보자’와의 신문 인터뷰 기사 내용이다.

유아 학대로 말미암아 유아를 사망하게 한 젊은 부부는 어떤 성격과 내면세계를 가진 사람들일까? 겉으로 건강하고 밝게 보이는 대학을 졸업한 평범한 시민이자 부모인 이들이 어떻게 입양한 아이를 지속적으로 학대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였을까?

그들이 받은 교양과 지성과 사랑은 어디로 갔는가? 어린 정인이의 생명과 인권, 살려고 하는 아우성을 어떻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이 사건은 평범한 시민들의 내면에 흐르는 이중성의 거친 모습이 외부로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 사례이다.

한편 시민들은 어떻게 하면 개인적 부드러움과 교양을 가질 수 있는가, 사회적으로는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관용하고 사회적인 약자나 나그네들에게 긍휼한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하는 과제를 던져준 사례이기도 하다.

‘공익제보자’와 인터뷰에는 서류를 조작한 권력의 “충격적인 내용을 보고 받은 후 긴 고민의 시간을 보냈다.”라고 적혀있다. 제보자는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당시 판단에 대한 부끄러움과 후회 때문에 결국 제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2년이 지났지만 늦게라도 국가기관에 의한 인권침해를 바로 잡고 불법을 저지른 자들에게 법에 따른 정당한 처벌을 바라는 마음으로 공익신고를 했다”라고 밝혔다.

는 이후에도 법치주의가 왜곡돼 가는 상황을 보며, “불법 출금이 선망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역할을 다하지 않아 생긴 사건인 만큼, 나 또한 책임 있는 자리에서 책무를 회피하면 안 된다고 공익신고를 결심했다”라고 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3차례의 변론을 하고 사형선고에 따라 독배를 마시며 죽어갔던 모습을 그린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그 내용도 놀랄 만하지만, 그와 유사한 사례가 여전히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는 고전이다.

소크라테스의 법정 변론을 통해서 들려주는 플라톤의 논조와 필치도 유려하거니와, 그 변론에서 나타나 있는, 당시의 포퓰리스트 정치가들, 소피스트를, 무지하고 쉽게 휘둘리는 대중들의 모습 그리고 자신의 헌신과 노력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과 사회에 대한 억울함, 권모술수, 모함 등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진실과 진리의 길, ‘숙고하는 삶’의 길을 가다가, 마침내는 담담히 독배를 마시려는 소크라테스의 모습과 변론이 눈에 선명하게 가슴 깊이 감동적으로 울려 퍼진다.

아테네의 민주정치가 소피스트들과 이기주의적인 정치가들에 의해 점차 잘못된 길로 접어들고 있음을 시민들은 알지 못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신탁, 즉 신의 명령에 따라 시민들에게 올바른 삶의 길을 갈 수 있는 ‘숙고하는 삶’(성찰적인 삶)을 살도록 헌신하였다.

친구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아킬레우스처럼, 소크라테스 역시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삶으로 인하여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불명예스럽게 피하지 않을 것을 천명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숙고하는 삶을 통하여 각자의 영혼을 돌보라고 권고하면서 영혼의 최선의 상태는 물질적인 부나 명예, 사회적 안정을 부차적으로 여기고 오로지 이성적인 사고와 비판적인 검토를 거쳐 진실추구에 전념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가장 귀중한 삶이라는 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성찰하는 삶’이란 ‘도덕적인 탁월성’(아레테, aretē)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당시 아테네 청년과 시민들이 살아왔던 전통적인 삶과 행동 양식을, 무지에 대한 자각과 비판적 검토를 통해 진실을 추구하는 삶으로 바꾸기를 권고하였다. 이러한 삶이 바로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이란 이곳에서 저곳으로 떠나가는 것이며, 저곳에서 좋은 사람들 지혜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즐거운 일이라 하였다. 그곳에서도 대화를 하면서 숙고하는 삶을 사는 일은 행복할 것이라 하였다.

죽음에 대해서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며,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그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쁜 일도 없으며, 신들이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재판관들에게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하였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변론을 마무리하였다. “이제는 떠날 시간입니다. 저에게는 죽으러, 여러분들한테는 살아가려 떠날 시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어느 편이 더 나은 쪽으로 가게 될지는 신을 빼고 모두는 모르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소크라테스가 권고하듯이, ‘숙고하는 삶’, ‘깨어있는 삶’, ‘말씀과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 날마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삶을 살아내어야 하는 책무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인은 ‘정인이’와 같은 어린 영혼을 무심히 거칠게 다루고 학대하기보다는 그 어린 생명과 영혼의 살려고 하는 생명 의지, 그 생명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과 신비를 알아가는 동행자의 소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 25:40)” 말씀하였듯이, 연약한 사람 아동은 말할 것도 없이, 주위의 동물과 길에 핀 야생화에 이르기까지 그 생명을 꽃피울 수 있도록 관심과 사랑으로 돌보는 아름다운 마음을 기독교인은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공익제보자의 용기는 나에게 큰 울림을 준다. 불이익과 불편을 각오한 공익제보자의 용감한 행동은 바로 ‘숙고하는 삶’의 전형이다. 하나님 안에서 진실과 정직을 선택하는 행동, 더구나 사회적 지도층이 지닌 영향력은 크고 책임은 더욱 막중하기 때문에 언행심사에 대해 그만큼 더 숙고해야 할 것이다.

불법이 성행하고 거친 이 시대에 나의 영혼과 내면의 소리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사회가 나로 인하여 조금 더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길이 무엇인지를,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통해서 다시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