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씨암탉 돌아오다
기고/ 씨암탉 돌아오다
  • 임동식 / 사)노인의 전화 전문상담위원
  • 승인 2023.03.14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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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식 / 사)노인의 전화 전문상담위원
임동식
임동식

[시정일보] 긴 겨울밤의 초저녁, 호롱불 밑에서병짚(술도가에서 파손을 막기 위해 술병에 씌우던 지푸라기 조물)을 엮으시며 어머니는 나에게 암탉 이야기해 주셨다.

때는 바야흐로 1958년, 아직 전란의 여흔이 선연하여 도시나 시골 어느 곳도 살림의 궁핍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보릿고개란 말을 실감하던 시절이며 나는 두 살배기 젖떼기였다고 한다.

우리 동네 이름은 바굴뫼이며 이름이 요즘의 마을 이름과는 달리만치 라디오 속 전설의 고향이나 근세기의 순정소설 속에 나오는 정감이 어린 이름이다. 산의 끝자락에 조성된 동네라 바굴뫼인지 또 어느 누가 지은 이름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바굴뫼는 산골짜기에 있는 동네이다.

봄이면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오솔길 옆 마른 억새 사이로 찔레꽃이 피고 산자락 언저리엔 복사꽃 살구꽃이 뻐꾸기 울음소리 뒤섞인 봄바람에 휘날리는 그림 같은 동네다.

우리 집은 산비탈의 끝자락에 독립된 두 채의 가옥 중 한 채였으며 집 주위는 세 면이 대밭이어서 바람이 불면 바람의 세기에 따라 솔바람과 댓잎의 나부끼면 소리가 어우러져 자연의 멜로디로 연출 되는 것이었다. 집 앞으로는 계단식 다랑논 들녘이 펼쳐지고 그 들 건너에는 산골짜기에 틀어박힌 듯, 박실이란 마을이 바라다보인다.

마을 동구에 있는 교회당의 십자가가 아스라이 보이고 주일이면 으레 그 교회당의 종소리가 덩그렁 덩그렁 들려오는 목가적인 모습이다. 집 앞에 서면 들 건너 오른쪽은 몽탄읍이 손에 잡힐 듯이 바라보이며 열차역이 있어서 시계가 흔치 않던 당시엔 역을 지나는 거 멍 대가리 열차 소리로 시간을 가늠했다고 한다.

어쨌건 젊은 사람이라면 청운의 꿈을 펼쳐야 할 도회를 향해 몸을 실어야 할 곳, 그곳이 바로 몽탄역이며 그 몽탄역은 우리 집들 건너에 있었다.

춘삼월, 들판은 지난가을 추수를 마치고 뿌려놓은 보리가 둑새풀과 키재기를 하며 자라고 있었으며 갯내 배인 해풍은 푸른 빛 보리밭을 일렁이게 하였다.

이런 어느 봄날의 해 질 녘, 어머니는 저녁을 짓기 위해 진 외갓집 마당 앞 우물에서 물을 길으러 집으로 돌아와 항아리에 막 붓고 계실 때였다.

고개 너머 점등으로 남의 집 일을 가셨던 아버지가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들어오셨다.

몇 해 전 군 제대를 한 아버지는 제대 당시의 군복을 아직 입고 있으셨으며 전후 물자가 충분하지 않았기에 그나마 군복이라도 다행 아니었을까.

들은 얘기로는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동난 이 터진 시기에 식량이 없어 주린 배를 채우려고 부잣집 아들을 대신하여 자원입대한 사람도 있었다고 하니. 차라리 입대하면 나라에서 삼시 세끼 밥은 주니 집에서 굶어 죽으나 군대서 총알 밥이 되어 죽으나 한가지라는 지론이었다. 그

아버지는 외양간에 들러 소여물을 주고 나오면서( 이 소는 이듬해 화재로 죽음)

''동식 어메! 어째 암탉 한 마리가 안 보이네?!''

하고 어머니에게 물으신다.

"글씨, 쌀강아지(살)가 물어갔나 어지께 부터 안뵝이요"

어머니도 못 봤다는 말씀에 아버지는 뒤꼍을 한 바퀴 돌아오시며

"이상허네 찰로(참말로) 살 강아지가 물어가 벗을까? 수덕아! 암탉 큰놈 못 봤냐?''

아직은 사물에 관심이 없을 아홉 살배기 딸이 알 까닭이 있을까? 수덕 누이의 대답 듣기를 포기한 아버지는

''이따가 어머이 오시면 물어봐야 쓰겠네.''

라고 혼잣말하시더니 없어진 암탉을 찾아 여기저기를 살피고 돌아다니시더란 것이다.

씨암탉의 행방을 발견한 것은 어제, 오늘이지만 사실 언제 없어진 줄 알 수 없는 일이다. 여러 마리 닭 중 한 마리쯤 없어져도 눈여겨보지 않는 이상 알 까닭이 없는 그것이 방목하여 닭을 치우니 날이 새면 제들 맘대로 횃대를 내려와 종일 먹이활동을 하고 날이 저물어 또 제들 맘대로 홰에 오르니 그것을 눈여겨보지 않는 이상, 한 마리쯤 없어져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동식아! 할머니라고 아실 리 있겄냐?"

어머니는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병집을 엮으시며 내가 얘기를 듣는 것인지 확인하려고 나를 불러 물어보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어머니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할머니도 역시 집에 계시지 않았으며 산으로 갈쿠나무 땔감을 하러 가신 까닭이다. 당시 갈쿠나무를 하여 몽탄 읍내에 내다 한 둥치에 5환을 받고 파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런저런 일 하시며 단돈 몇 푼이라도 생기면 장으로 나가 당갈(달걀)을 사거나 병아리를 사셨고 닭을 키워 알을 낳으면 병아리로 부화시켰으며 이것을 반복하여 소도 사신 것이다.

''그런 마당에 씨암탉이 없어졌는디 얼마나 짠허겄냐?''

어머니는 병집을 엮으시며 얘기를 이어가셨다. 아버지는 암탉이 사라졌을, 아니 '꼬꼬댁, 대며 돌아올 것만 같은 대밭 뒤를 바라보시며 짠해하시더란 것이다.

짠하기는 어머니라고 다르셨을까. 며칠이 지났을까 잠자리에 들며 아버지는

''횃대 한 번 둘러봤는가? 암탉 말이여.?''

하고 어머니에게 물으신다.

''아따! 서운허기는 허것소만 인자 잊어 부이 쇼! 한 번 물어간 살 강아지가 여깃소 허고 내놓을 리도 없고 누가 잡아 묶었으면 진작 합수 통에(정화조) 들어가 붓제라우.''

''그럴 테제. 그나저나 알 수가 없네. 살 강아지가 물어갔으면 집 엉터리에 터럭이라도 빠졌을텐디.''

아버지는 못내 아쉬운 듯 이불을 당겨 뒤집어서 쓰시고 잠을 청하시더란 것이었다.

시간이 가고 날은 흘러 달이 바뀌었다. 산 너머 영산강 쪽으로부터 남풍이 불어오는 5월이 되자 울타릿 가 보리수는 빨갛게 익어 갔으며 푸르던 보리 이삭 또한 누렇게 익어갔다. 이 시기가 되면 보릿고개의 절정으로 들판이나 산비탈, 밭 어귀의 나물이나 심지어는 이름 모를 풀조차도 남아나지 않는 것이 배고픈 민초들의 민생고 해결책이 거기 있었기 때문 이리.

논밭은 무에서 유의 창조의 마당이다. 농민들은 맨땅에 씨를 뿌리고 그것은 푸른 생명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며 사람들은 이를 통해 허기짐을 달래갔을 것이니 논과 밭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훌륭한 마당이 아니런가?

들판의 보리가 수확되면 배를 주리던 보릿고개는 끝이다. 이 시기, 6, 25동란의 여흔이 남긴 농민들의 애한은 보릿고개 굶주림이라고 했다. 긴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면 빈 곡간을 바라보며 배고픔의 시련을 겪어야 했을 것이니 이는 행복의 주요 여건인 생존의 본능과는 엇박자 진 모습 아닌가.

시기적으로 이러한 현실 속에 있던 농민들, 이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보리 수확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며 그 굶주림을 일시적이나마 해결할 수 있는 시기가 비로소 도래한 것이다. 보리 수확함으로 들판의 논은 하나둘 맨땅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들판이 다 비워질 무렵 우리 집은 때아닌 경사가 났다.

이른바 암탉 회귀 사건의 발생, 아버지와 어머니는 논에서 베어 온 보리에 도리깨질하고 있을 때였다.

''아부지! 쩌기 닭이 왔어라우!''

아홉 살배기 수득 누나가 숨찬 소리를 하며 아버지 쪽으로 달려왔다. 도리깨질을 멈춘 아버지가

''먼 닭이 왔다고 그런다냐?''

하고 물으시자 수득 누나는 손가락으로 집 앞의 뜰을 가르쳤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들고 있던 도리깨를 마당에 팽개치고 앞을 다퉈 집 앞으로 나가셨다.

집 앞의 오솔길 밑으로 비스듬히 내려 누운 뜰, 그곳에는 지난 초봄에 집을 나갔던 씨암탉이 모이를 쪼아대며 집을 향해 올라오는 중이었으며 암탉의 앞뒤로는 빛깔도 아름다운 노란 병아리들이 어미를 따라 먹이 장난에 여념이 없었다. 병아리의 수는 무려 열네 마리나 되었다고 한다.

''우메! 쩌 참에 없어졌든 닭 아니여라우?''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뻔한 사실을 어머니는 아버지를 바라보시며 물었으며 아버지는

''크니(글쎄) 호박이 덩굴 째 들와 부렀네''

하고 즐거워하시더란 것이다. 암탉만 돌아와도 본전에 이른 판인데 생각도 못 했던 병아리들까지 그것도 열네 마리씩이나 꼬리를 달고 들어왔으니 집안의 경사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실은 어머니나 아버지 두 분은 말로 표현은 안 했지만, 워낙 배고픈 시절이라 가족 중 누구, 할아버지나 할머니 아니면 삼촌, 그 누구인지 닭을 잡아먹고 모른 척 시치미를 떼었는지도 몰라며 심증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씨암탉이 사라진 후 제 새끼들을 데리고 회귀하기 전까지 말이다. 암탉은 그동안 보리밭의 우거진 풀과 벌레들을 쪼아 먹으며 풀밭에 알을 낳고 품었던 것이며 보리 수확이 다 되고 들판의 맨땅이 드러나자 집으로 찾아들었다.

아버지는 나무둥치를 이고 집으로 들어서시는 할머니를 향해

''어무이! 쩌참에 나갔던 암탉이 돌아왔소."

이렇게 외치며 울타리 밑 마당 어귀를 노니는 암탉과 병아리들을 손으로 갈치셨다.

''오메! 참말로 삥아리 새끼까지 데리고 왔다니. 이 그것이 먼 조화 속이다냐?!''

할머니는 이고 있던 나무둥치를 마당에 내려놓으시고는 '훨훨' 웃으셨으며 이로써 잠깐 공허했던 우리 집 마당에 개나리색 노란 병아리의 평화가 퍼져가고 있었다는 것이었으며 아버지는 병아리들에게 모이를 주시며 얼굴 가득 희열의 미소를 짓고 계시더란 것이다.

밤은 깊어가는데 문풍지 바람에 호롱불은 하늘거리고 밤바람이 찬 까닭일까 봐 창 너머로 밤 부엉이 울음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온다. 어머니는 피곤하지도 않으신지 아직도 병집을 엮고 계셨으며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 깊은 잠으로 빠져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