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16 충성과 애민의 지도자 표상을 보여주다
인문학 산책 #16 충성과 애민의 지도자 표상을 보여주다
  • 현외성(경남평생교육연구원장)
  • 승인 2023.03.24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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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외성 | 경남평생교육연구원장, 사회복지학 박사
현외성 연구원장
현외성 연구원장

[시정일보] 최근 부동산 문제로 혹은 아파트 등 집값 문제로, 다른 한편 LH 사태, 고위 공무원 및 정치인들의 부동산 투기는 말할 것도 없고 젊은이들 역시 ‘영끌’ 투자로, 사회는 온통 들끓고 있다.

한국 사회가 지난 반세기 동안 급속한 경제성장을 하면서 소득수준이 향상되었으나 소득 양극화와 서민들이 집을 소유하는 문제는 늘 사회적 쟁점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사회적 지도층에서 드러난 부동산 투기는 시민들로 하여금 좌절과 분노를 불어 일으키고 있다. 권력과 직업상 알게 된 정보를 이용하여 개인과 친인척들의 재산을 증식시키는 행위는 도덕적으로나 법률상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시민으로부터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불법적이고 도덕적 해이와 타락은 동시에 성실하고 준법적인 일반 시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절망감을 주고 사회 전반에 도덕적 불감증과 불법적 행위를 자극하는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하고 국가개혁, 제도개혁을 위해,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개선하고자 노력하였던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오늘의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지도층의 부정부패와 부도덕성을 해결하고 부끄럽게 하는데 귀감이 되는 명저이다.

다산은 1762년(영조 38년)에 태어났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조선이 중대한 변화를 맞이하였던 시대, 누적된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고 동요가 일어나던 시대, 조정은 당쟁의 폐단이 극도로 심각해지고 있었던 시대에 다산이 활동하였다.

지방에는 부패한 지방수령의 탐학과 토착서리의 농간으로 가혹한 수탈이 자행되면서 행정의 문란도 극도로 혼란해져 가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양의 과학과 천주교가 유입되면서 유교적 전통과 충돌하면서 사상적 변화가 실학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다산은 28세 때(1789년)부터 벼슬길에 나가 39세 때(1800년)에 끝났다. 정조 임금 재위 기간 중 12년 동안 임금의 측근에서 극진한 총애를 받으며 여러 직책을 수행하였다.

33세 때 경기도의 암행어사로 파견되기도 하였고, 34세 때 잠시 충청도 금정역 찰방으로, 36세 때는 황해도 곡산부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다산을 총애하고 보호하던 정조 임금이 세상을 떠나고 그다음 해 그가 40세 때(1801년) 12세 된 순조임금이 즉위하였다.

이 시기에 신유사옥이 발생하여 천주교도를 처형하면서 정약용도 그 형님 정약전과 함께 유배되었다. 18년 동안 유배지에서 다산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가다듬어 학문과 저술에 힘썼다.

그는 자신의 학문체계를 ‘경학’과 ‘경세론’을 두 축으로 하여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경세론에 속하는 『경세유표』(1817년 순조 17년)는 망국의 길에 선 국가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전체적인 틀을 제시하였다면, 『목민심서』(1818년, 순조 18년)는 지방수령, 즉 목민관으로서 지켜야 할 마음가짐, 실무지침, 다양한 제도의 목적과 한계, 경계해야 할 대상과 비리의 유형 등을 제시한 책이다.

또한, 『흠흠신서』(1819년 순조 19년)는 일종의 법률서로서 살인사건 등을 심리하고 적용하는 데 따르는 실무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목민심서』는 전체 48권 16책으로 된 필사본이다.

이 책은 지방의 수령이 부임하면서부터 직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까지 알아야 할 사무를 시간의 흐름과 임기를 수행하는 과정과 분야로 나누어 세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다산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이전 역사에서 참고할 수 있는 다양한 목민관의 행적과 사례를 선택하여 서술하는 한편 지방 아전들의 폐단을 수집하여 예를 들면서 종류별로 나누어 적고 필요시 자신의 의견도 덧붙이고 있다.

다산은 『목민심서』에 이러한 내용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담아 집필하였는데, 그 구성은 12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편은 다시 6조 목으로 구분하여 전체 72조로 이루어져 있다.

부임(赴任),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 이전(吏典), 호전(戶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형전(刑典), 공전(工典), 진황(賑荒), 해관(解官)이 그것이다. 예컨대, 부임 편에는 부임 과정에 대한 내용으로, 제배(際拜), 치장(治裝), 사조(辭朝), 계행(啓行), 상관(上官), 이사(莅事)의 6조 목이 들어있다.

다산은 “군자의 학문은 수신이 반이며, 나머지 반이 목민이다.”라고 하면서, 일생을 학문하는 배움의 자세로 살았다. 학문과 배움의 목적은 군자로서 수신과 백성을 돌보는 목민의 삶을 올바르게 수행함에 있었다.

과거를 준비하거나 벼슬길에 있거나 혹은 유배지에서 고독하고 힘든 삶을 살 때에도 그리고 고향에 돌아와 살아갈 때에도, 한결같이 학문을 통하여 수신과 제가와 치국에 대해 생각하고 고뇌하며, 군자로서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목민심서』는 어린 시절 현감, 군수, 도호부사, 주(州)의 목사를 지냈던 선친을 따라 살면서 보고 들은 경험과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배운 ‘경학’은 물론 귀양살이 18년 동안 16년을 불굴의 자세로 공부하여 일가를 이룬 이론적 윤리적 바탕 위에서 체계화된 ‘경세론’ 중의 한 작품이다.

다산이 생각하기로 지방의 수령은 이상적인 군자로서, 위로는 임금을 섬기고 임금의 통치이념과 백성을 향한 사랑이 백성에게 전달되도록 하면서 동시에 지역에서 임금의 대행자로서 백성들의 삶의 전체 영역을 책임지고 섬기고 목양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지방 수령은 이상적으로 학문을 통하여 수신과 목민을 목적으로 사는 삶을 다산은 구상하였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지방 수령들은 학문을 통해 자신을 닦고 백성을 섬기는 자세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목민심서』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눈에 띄는 중요한 내용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령은 바른 몸가짐을 가지고 청렴하며 절약하며 검소하며 예의 있는 교제를 하며, 원칙에 엄격하며 공정하며 백성을 사랑하며 인재를 잘 사용하며 물정에 밝아야 한다.

특별히 아전에 휘둘리지 않도록 함이 중요하다. 감옥에 있는 죄수를 불쌍히 여기며 살인사건과 같은 송사에 심의와 판결을 신중하고 지혜롭게 할 수 있어야 하며 변란에 대비하고 성곽을 잘 수축하고 정비해야 한다.

수리사업과 병기 관리도 철저해야 한다. 그리고 책의 후반부에는 수령직이 교체되고 벼슬을 잃어도 연연해하지 않으며 돌아가는 행장은 조촐함이 맑은 선비의 모습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와는 다르게 부정적인 측면에서 72조 각각의 영역에서 수령의 잘못과 비리, 수탈을 지적하면서 이를 피해야 함을 서술하고 있다. 다산은 어떤 직책을 맡더라도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어느 곳에 있더라도 정갈하게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선비로서 군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한 삶을 살고자 하였던 흔적을 그의 저술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39세에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 하였을 때, 『노자(老子)』에는 “머뭇머뭇하노라(與), 겨울 시내 건너듯, 조심조심하노라(猶), 사방을 두려워하듯”, 마음과 생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중에 그야말로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온 세상에 떳떳한 일이 아니면 하지 않는다는 다산의 마음을 그 이름에서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42세에 강진의 유배지에서 외롭고 처량하며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한 처지에서도 다산은 밥 파는 노파의 좁은 집에 세 들어 사는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지었다.

‘네 가지 마땅한 방’이란 뜻인데, 생각은 마땅히 담박해야 하고, 외모는 마땅히 엄정해야 하고, 말은 마땅히 과묵해야 하며, 행동은 중후해야 한다는 뜻을 모아 각오를 다지며 『주역』 공부에 매진하였다고 한다.

다산은 일생을 학문하는 자세로 자신을 오롯이 하며 백성의 고달픔을 마음 아파하면서 500여 권의 저술을 다양한 분야에 걸쳐 남겼다. 다산에게는 올바름 순수함 선함이 있고 인간에 대한 존중과 진정한 예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엄격하였으나 다정하고 따뜻하였다.

오늘의 혼탁한 세대에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며 국가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양있는 시민, 참된 공직자와 지도자가 그립다. 시공을 초월하여 한 시대를 아름답고 치열하게 온몸으로 살았던 정약용 선생님을 생각하며 가슴 뭉클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