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인문학산책/ 방랑시인 김삿갓의 삶
시정인문학산책/ 방랑시인 김삿갓의 삶
  • 임현기/사)동양서예협회 이사장
  • 승인 2023.04.03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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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기 | 사)동양서예협회 이사장, 서예가
임현기
임현기

[시정일보] 방랑 시인 김삿갓 난고 김병연(蘭皐 金炳淵, 1807~1863), 해학과 풍자를 통해 민중과 함께한 시인 조선 철종 때 방랑시인 김삿갓의 삶을 유행가 가사에 담아 현재까지도 국민에게 가슴 한쪽에 애잔하게 다가와 사랑을 받는 노래이다.

천재 시인이며, 제도권에서 벗어난 일탈자이며 방랑자로 일생을 살았던 김삿갓, 당시 서민들은 그의 시에 울고 웃었다.

부부아립등허주 浮浮我笠等虛舟

일착평생사십추 一着平生四十秋

목수경장수야독 牧豎經裝隨野犢

어옹본색반백구 漁翁本色伴白鷗

취래탈괘간화수 醉來脫掛看花樹

흥도휴등완월루 興到携登翫月樓

속자의관개외식 俗子衣冠皆外飾

만천풍우독무수 滿天風雨獨無愁

정처 없이 떠도는 내 삿갓 마치 빈 배와 같이
한번 쓰고 다닌 지 사십 평생이어라
더벅머리 목동의 소몰이 갈 때의 차림새이고
갈매기 벗하는 늙은 어부의 모습 그대로일세
술에 취하면 의복 벗어 나무에 걸고 꽃구경하며
흥이 나면 손을 들어 누각에 올라 달구경 하네
사람들의 의관이야 겉모습 치장하기에 바쁘지만
내 삿갓은 비바람 몰아쳐도 근심 걱정 없다오!


칠언절구(七言絶句, 한 구절이 일곱 글자로 된 절구를 가리킨다.)의 이 시는 아마도 생의 말년에 지금껏 방랑자로 살아온 자기 모습을 관조하는 시다.

그가 남긴 시들은 대부분 세상인심을 조롱하는 풍자시 들이지만, 삿갓의 노래는 드물게 자기 모습을 모델로 하는 시라 할 수 있다. 인생, 곧 나그네의 삶이란 거추장스러운 것은 짐이 된다.

가진 것 없으니 버릴 게 없고 버릴 게 없으니 오늘 밤 자고 내일 아침에 떠나도 아까운 것도 미련도 없었다. 하늘을 가리는 낡은 삿갓 하나만 있으면 근심 걱정 없다는 것이다.

그는 1807년 3월 13일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본명은 병연(炳淵),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며 일명 김립(金笠) 또는 김삿갓이라 불렀다.

그의 운명은 1811년(순조 11)에 일어났던 홍경래(洪景來)의 난으로 인해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다. 당시 그의 조부였던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 난 때 투항한 죄로 멸족을 당하다시피 되었다.

일반적으로 김병연이 강원도 영월에서 치러진 백일장에서 장원급제하였으나, 당시 백일장의 시제가 홍경래 난 때 투항한 선천부사(宣川府使)였던 그의 조부 김익순을 꾸짖고 그와 반대로 결사 항전하여 죽은 가산군수(嘉山郡守) 정시(鄭蓍)의 충절을 찬양해 장원급제하여 집으로 돌아왔으나, 과거시험의 시제를 묻던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그의 조부라는 말을 듣고 그 충격으로 인해 조상을 욕하고 합격했던 자신을 죄인이라 하여 붓을 꺾고 평생 삿갓을 쓰고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세상을 풍자하고 비판했다고 전해지는 사실이다.

이십수하삼십객 二十樹下三十客

사십촌중오십식 四十村中五十食

인간기유칠십사 人間豈有七十事

불여귀가삼십식 不如歸家三十食

스무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

망할 놈의 마을에서 쉰 밥을 주네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다 있는가

집에 돌아가 설은 밥 먹는 것이 낫겠네

집 떠나면 고생이고 서러움 많은 것인데 어느 고을에서 푸대접당한 것을 숫자를 가지고 절묘하게 시를 지어 경탄을 자아내고 있다.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양반과 시를 주고받으며 시사를 풍자하였다.

또 어느 날 해가 저물어가는 때 지친 심신을 달래고 하룻밤 묵어가기 위해서 당에 들러 훈장에게 하룻밤 먹고 재워줄 것을 청하자 남루한 모습의 김삿갓을 쳐다보면서 내가 운자(韻字)를 부를 테니 시를 지으면 하룻밤 재워준다고 하는 게 아닌가? 김삿갓이 그렇게 하자고 말하고 운자를 부르라고 하며 서당 훈장이 멱(覓) 자를 부르자,

허다운자하호멱 許多韻字何呼覓

피난유멱황차멱 彼難有覓況此覓

일야숙침현어멱 一夜宿寢懸於覓

산촌훈장단지멱 山村訓長但知覓

하고많은 군자 중에 하필 멱 자인가

저 멱 자도 어려웠는데 하물며 또 멱 자인가

오늘 밤 먹고 자는 데 멱 자에 달렸구나!

산촌 훈장은 단지 멱 자밖에 모르는구나

라고 시를 짓자, 서당의 훈장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껏 글을 꽤 했다고 하는 사람들 그 누구도 이 멱 자의 운으로 답을 하지 못했는데 김삿갓은 단숨에 이를 지어버렸다.

사면 기둥 붉게 타 / 석양 식객 시장타 / 네절 인심 고약타 / 지옥 가기 꼭 좋타

위의 시는 어느 절에 들러 굶주린 배를 달래기 위해 절간에 있는 주지 스님에게 밥을 좀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해 한글로 지은 시이다. 또, 어떤 시골 총각이 재색을 겸비한 이웃집 양반가 처녀를 사모해서 그 처녀의 시녀를 매수하여 편지를 5일마다 보내었는데 10번째에 답장을 보내왔는데, 그 처녀가 사서(四書) 등을 읽은 재원이라 적(籍)이라는 글자 한 자만 편지의 중간에 쓰여 있어서 아무리 봐도 해석이 되지 않자 김삿갓을 찾아서 자문을 구하자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대나무 숲에서 21일 저녁에 보자고 해석해 주었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은 혼인하였다고 한다.

어느 고을에 진갑(進甲)을 맞이하는 양반이 사또를 초청했는데 래불(來不), 왕래(往來), 불왕(不往) 편지를 보내와서 해득되지 않자 김삿갓에게 해석을 부탁하였다.

이리저리 궁리하던 김삿갓이 ‘오지 말라고 해도 가겠는데 하물며 오라고 하는데 왜 가지 않겠느냐.’라고 풀어주어 진갑을 맞는 양반을 기쁘게 하였다.

어느 노인이 아들을 낳을 요량으로 처녀에게 장가들어 나이 80세에 아들을 낳고 그만 죽었다. 팔십득남 비오자(八十生男 非吾子)라는 글을 남겨놓고서 유족 측에 ‘득남했으니 내 아들이 아니다. 아기 엄마에 득남했던들 어찌 내 아들이 아니리오.’ 반어법 형제처럼 재산을 놓고 유족 측과 아들을 낳은 처녀 측과 분쟁이 붙었다. 이때 김삿갓은 딱한 처녀 편을 들어 해석해 주었다.

세상이 말 때문에 어수선하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시정배보다 못한 언어폭력을 넘어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그 속에서 웃음을 잃지 않는 해학적이고 풍자를 통해 주변을 감동을 주었다.

김삿갓을 통해 바쁘고 지친 일상사를 한 번쯤 우리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봄도 좋을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