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18 방황하던 영혼이 용서와 사랑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다
인문학 산책 #18 방황하던 영혼이 용서와 사랑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다
  • 현외성(경남평생교육연구원장)
  • 승인 2023.04.05 09:27
  • 댓글 0

현외성(경남평생교육연구원장, 사회복지학 박사)
현외성 연구원장
현외성 연구원장

[시정일보] 코로나 사태는 생명의 위협을 가져오는 전염병이지만 이로 인한 일상생활의 파괴와 경제적 붕괴는 더 큰 위험으로 마치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지만, 더 큰 위험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하게 퍼져나가는 인간관계의 단절과 심리‧정신적 문제의 발생과 확산, 그리고 사회적 관계와 구성의 변질이라는 '실재'적인 문제이다.

특히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은 실재적인 문제의 핵심은 집, 가정, 가족의 해체이다. 집은 혈통으로 이어진 최소한의 집단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바탕이며 인간 삶의 필수적인 요소인 공동체이다.

사람은 집에서 부모로부터 태어나고 성장하며, 결혼하여 가족을 형성하며. 자녀를 낳고 기르며, 늙어가며 죽는다. 집은 생명의 출발이며 생명의 유지며 생명의 마지막 장소이다.

집과 가정의 해체는 어느 시대 국가에나 있었지만 21세기 지식정보사회 더욱이 코로나 사태로 더욱 가속화되고 있음이 큰 사회적 개인적 문제이다.

헨리 나우웬의 책 『탕자의 귀향』은 성경 누가복음 15장 11절에서 32절에 나오는 '잃은 아들의 비유' 혹은 '탕자의 비유'를, 렘브란트가 1668년 유화로 그린 작품을 보면서 묵상한 내용을 담은 기독교 서적이다.

성경의 내용은 워낙 유명하여 기독교인들에게나 심지어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져 있는 예수님의 비유의 이야기이다.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이 아버지 재산을 탕진하고 회개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품에 안긴다는 스토리이다.

『탕자의 귀향』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감동을 주는 것은, 헨리 나우웬의 깊은 영성에서 나오는 성경해석은 물론 렘브란트의 고뇌에 찬 삶을 기독교적 그림으로 승화시킨 작품을 영감 있게 상호 연결시키는 그의 능력에서 가능하다.

헨리 나우웬은 '탕자의 귀향'이라는 렘브란트의 그림의 원본을 보기 위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찾아서, 전시 중인 그림을 오랜 시간 동안 몰입하여 관찰하였다.

나우웬은 17세기 네덜란드의 번영과 화려함 그리고 당시 렘브란트의 젊은 날의 성공과 명성, 그리고 가족사의 아픔, 굴곡과 생애 후반기의 몰락과 외로움을 추적하면서, 그의 그림이 점차 내면으로 신앙적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파악하고 있다.

렘브란트는 많은 성서화를 그렸는데(전체 작품의 1/3이 성서화) '탕자의 귀향'은 젊은 시절부터 여러 가지 습작이나 드로잉, 동판화 등을 거쳐 마침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완성한 유화 작품이다.

나우웬은 1668년 '탕자의 귀향' 유화 작품에 남겨놓은 렘브란트의성경 해석을 집요하게 따라가면서, 성경의 예수님의 이야기, 렘브란트의 삶과 신앙,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면서(나우웬은 내면의 말씀의 인도에 따라 하버드 대학교수직을 스스로 사임하고 정신지체인 공동체에 사역한다.) 묵상한 내용을 적은 책이 『탕자의 귀향』이다.

나우웬은 렘브란트의 그림에 나타난 둘째 아들, 맏아들 및 아버지를 보면서, 성경의 예수님의 비유의 이야기를, 렘브란트의 생각과 더불어 자신의 삶의 고백을 세밀하고 깊게 고백한다.

사실 본래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비유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장하는 좁은 신앙과 교리에 대응하여, 넓은 구원과 구속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과 거룩한 구별된 생활을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주장에 대응하여, 예수님은 유대인은 물론 '회개하는' 세리와 죄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이방인들에게 구원은 열려 있으며, 예수님 자신은 이들 '잃어버린' 생명, ‘죽었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음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이야기이다.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던 죄인이 집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긍휼한 마음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기다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나타내는 스토리이다.

회개하고 돌아와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 안에서 모든 은혜 입은 사람들이 함께 기쁨을 나누어야 하는 집, 공동체를 묘사하고 있다. 집에 돌아온 탕자인 둘째 아들은, 나우웬의 묵상에 의하면, 하나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영적 삶의 기나긴 여정에서 방황하고 고뇌하였던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렘브란트 역시 청년 시절 재능을 인정받고 세상에서 유명하게 되었을 때 세상적인 욕망과 재물과 명예를 추구하며 살아왔던 모습의 자화상을 그렸다.

그러나 성공과 명성, 부를 누리던 시기는 금세 지나가고 곧바로 슬픔, 불행, 재난의 시절이 닥쳐오면서 비로소 내면을 성찰하는 눈으로 인간과 자연을 꿰뚫어 보기 시작하였다.

나우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그 품에 얼굴을 파묻은 탕자를 처음 대하는 순간, 한때는 두려울 것 없을 만큼 당당했으며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그토록 애써 끌어모은 온갖 영화가 모두 헛것이었음을 아프게 깨달은 한 예술가의 초상이(탕자의 그림에서) 어쩔 수 없이 겹쳐 보였습니다."

탕자는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 품 안에서 진정한 안식과 평화를 찾았다. 렘브란트는 둘째 아들과 아버지가 만나는 시점에 옆에서 냉정하고 무심하게 서 있는 남자를 맏아들로 그려 넣었다고 미술평론가들이 생각하고 있다.(성경상의 이야기하고는 시점의 차이가 있다).

맏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대표하는 반면, 자리에 앉은 채 가슴을 치며 돌아온 둘째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이는 청지기로서 죄인과 세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림에 나타나 있는 맏아들의 불평과 분노는 오늘의 성도들 사이에 판단과 정죄, 편견이 횡행하고 있는 모습과 다름없다. 아버지 집에 있으나 가출한 둘째 아들과 유사한 종인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빛 사랑의 빛 가운데에 발을 들여놓아야 마침내 이웃을 나와 같은 하나님께 속한 형제로 인식할 수 있게 되고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된다.”

신부로 믿음의 공동체에 속하여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나우웬 자신의 내면에도 맏아들과 같은 불평과 분노의 모습이 문득 자리 잡고 있음을 고백하면서 자신 역시 맏아들과 같은 자리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을 묵상하였다.

렘브란트의 그림에 나타난 아버지는 긴 삶의 여정에 지치고 시력까지 약하여졌으나, 집으로 돌아오는 탕자를 아직도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아들을 알아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안아줄 수 있는 사랑과 용서의 아버지이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에 자리 잡은 내면의 시선으로 아들을 알아보는 평온한 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리는 쪽으로 렘브란트는 성경의 아버지를 화폭에 그려 넣었다.

나우웬은 그림에 나타난 아버지를 다음과 같이 묵상하고 있다. “육신의 눈이 거의 감기다시피한 아버지는 오히려 더 멀리, 그리고 널리 봅니다. 그것은 인류 전체를 아우르는 영원한 시선입니다. 시간과 장소, 성별을 초월해서 모든 이들의 상실과 방황을 살핍니다. 집을 떠나는 쪽을 선택한 자녀들이 겪는 아픔을 알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가슴 아파하는 눈길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길 잃은 자식을 집으로 데려오려는 열망으로 뜨겁게 타오릅니다.”

나우웬은 둘째 아들, 맏아들을 거쳐 아버지가 되는 영적 여정을 걸어간다고 하였다. 어쩌면 우리들 역시 기독교인으로서 탕자와 같은 둘째 아들, 집에서 성실하게 순종적으로 살고 있으나 속으로 불평과 불만을 가진 맏아들을 넘어서, 더 깊은 영적 세계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용서하고 포용하며, 위로하고 품어주며, 모든 것을 내어주는 아버지로서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부르셨고 또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능력을 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

렘브란트, 탕자의 귀향, 1668, 유화
렘브란트, 탕자의 귀향, 1668, 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