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앞 / 악행은 봄눈처럼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녹아들어
시청앞 / 악행은 봄눈처럼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녹아들어
  • 정칠석
  • 승인 2023.04.06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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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 爲惡(위악)에 不見其損(불견기손)은 如庭前春雪(여정전춘설)하여 當必潛消(당필잠소)니라. 이 말은 채근담에 나오는 말로써 ‘악한 일을 하고서도 그 손해를 보지 못하는 것은 마치 뜨락의 봄눈처럼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녹아들기 때문이다’는 의미이다.

단테는 <신곡>에서 가을의 나뭇잎이 하나 또 하나 떨어져서 온통 땅을 뒤덮어 버리듯이 그렇게 아담이 뿌린 악의 씨도 하나 또 하나 그 기슭을 떠나간다고 애통해 했다. 하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이 점점 비대해지는 만큼 악은 그 영역을 더욱 넓힐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선과 악이 각각 신의 왼손과 오른손이라면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루소가 말하기를 ‘인간이여 악의 장본인을 찾으려고 하지 말라. 이 장본인이야말로 그대 자신이다. 그대가 지금 행하고 있는 악이나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인내하고 있는 악 이외에는 악이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느 것이라도 그대 자신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뜨락에 봄눈이 녹아드는 것처럼 악행은 눈에 보이지 않게 속으로만 그 죄업이 늘어간다. 악행으로 인한 손해는 그 스스로 알 수가 없다. 법구경에는 ‘악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 도로 사람의 마음을 망친다. 마치 녹이 쇠에서 나와 바로 그 쇠를 먹는 것처럼’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작금에 들어 강남 한복판에서 40대 여성이 납치된 뒤 살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져 우리를 경악케 하고 있다. 경찰이 공개한 CCTV에는 지난달 29일 오후 11시46분쯤 강남구 역삼동 한 아파트 앞에서 한 남성이 피해 여성을 질질 끌고 나와 차도에 정차한 차량에 강제로 태우고 다른 남성이 운전석에 올라탄 뒤 현장을 떠나는 장면이 담겼다. 범죄가 벌어지는 동안 차량 앞쪽에 있는 도로 상황도 CCTV에 찍혔는데 버스와 승용차 등 교통량이 꽤 많은 시간대에 범인들의 뻔뻔하고 대담한 행각에 우리는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서울경찰청은 사건 발생 3분 뒤인 당일 오후 11시49분쯤 가장 강력한 출동 단계인 코드 제로를 발령, 초동조치를 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렇게 코드제로까지 발령됐는데 범행 차량이 어떻게 검문을 피해 대전까지 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갖지 않을 수 없으며 경찰의 주장처럼 초동대응과 수사가 과연 적절했는지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사건 현장인 역삼동은 주변에 학원가와 학교가 있어서 경찰이 상시 순찰하는 지역인데도 불구하고 112신고와 CCTV가 범죄 순간을 포착하고도 늑장 대처로 인명을 구하는 데 실패했다면 민생 치안에 큰 구멍이 난 것으로 결코 그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