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인문학산책/ 포스트 아베 시대, 한일관계에 현실적 접근 필요
시정인문학산책/ 포스트 아베 시대, 한일관계에 현실적 접근 필요
  • 임은정 | 공주대 국제학부 교수
  • 승인 2023.05.03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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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정 | 공주대 국제학부 교수, 국제학 박사
임은정 교수
임은정 교수

[시정일보] 지난 7월8일 금요일 점심시간,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총격을 당해 심폐 정지 상태란 소식을 접하곤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짜 뉴스가 판을 치는 세상이니 뭔가 그런 일이 또 벌어진 것인가 싶기도 했다. 일본 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린 이 사건은 여러 해 동안 학생으로 또 교수로 일본에서 생활했던 필자에게도 충격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학자로서는 아베라고 하는 거물 정치인의 인생이 자민당의 승리가 확실했던 참의원 선거를 불과 이틀 앞둔 시점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사건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 놀라울 수밖에 없었고, 개인적으로는 교토(京都)에서 생활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범행 장소가 준 충격도 컸다.

나라(奈良)라는 조용한 고도(古都)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도무지 어색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게다가 자위대 출신의 용의자가 사용한 무기가 사제 총이었고, 그의 집에서 다른 폭발물이나 총기도 발견되었다고 하니 소름마저 돋았다.

치안만큼은 최고라고 자부하던 일본 사회가 어쩌다 가 이 지경이 된 것일까? 범행 동기도 충격적이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야마가미 테츠야(山上徹也)는 자신의 어머니가 빠진 통일교에 원한을 품게 되었고, 통일교의 수뇌부를 공격하고 싶었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통일교와 관련 있어 보이는 아베 총리를 대신 노렸다고 했다.

아베 사후 일본 언론에서는 연일 통일교에 관한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다. 한국에서 시작된 통일교에 원한을 품은 야마가미의 손에 한국인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아베가 죽임을 당했다고 하니, 한국과 일본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생각마저 들어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올해 6월 다른 소장 학자들과 함께 『주저앉는 일본, 부활하는 일본』이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을 함께 집필한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갖고 있던 문제의식은 우리 사회가 가진 일본에 대한 단편적이면서도 고정적인 인식을 대체할 만한 일본에 대한 보다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해석을 제시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국제사회에서 선진 경제 대국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영원히 침략자로 기억될 일본이라는 나라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과연 그렇게 집요하고 주도면밀한 국가인가라는 부분에 대해 좀 다른 시각을 제시하고 싶기도 했었다.

이번 아베 피격 사건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일본 사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일종의 환상에 가까운 이미지에 균열을 만든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정말로 우리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이 느끼는 만큼 국가 주도적이고 치밀하게 계획적인 나라였다면, 유세 중인 거물 정치인의 후면이 그렇게 무방비 상태이지도 않았을 것이며, 첫 총탄을 맞은 뒤돌아보는 아베가 아무 보호도 받지 못하고 두 번째 총탄을 맞는 상황도 발생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인터넷에서 구입한 물품들로 살인이 가능한 무기를 만들어 소지하고 그 무기를 길 한복판에서 꺼내어 들어 방아쇠를 당기기까지 아무도 이를 제지할 수 없었다면 일본이 안전한 사회라는 인식도 일종의 허구였는지 모른다.

우리 사회는, 그리고 일본 연구자라는 나 자신은, 과연 일본을 제대로 보고 있었던 것일까. 머릿속에서 물음표가 커져만 갔다. 예상된 압승, 그러나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 보수의 상징과도 같던 거물 정치인이 총탄에 스러졌지만, 참의원 선거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아베 피격 사건이 없었더라도 자민당은 무난히 과반수를 차지할 것이 예상되었던 만큼 그의 죽음이 이번 선거 결과에 엄청난 변수로 작용했다고 평가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것이다.

자민당은 기대만큼 혹은 기대보다는 조금 더 선전했고, 입헌민주당은 쓰디쓴 고배를 마셨으며, 공명당은 연립여당으로서 그나마 체면을 유지했고, 일본유신회는 기대 이상으로 약진했다.

결국 자민당, 공명당, 일본유신회, 국민민주당으로 구성되는 소위 ‘개헌세력’이 개헌 발의가 가능한 3분의 2(166석)를 한참 웃도는 177석을 차지하게 됨에 따라 개헌을 위한 국회 구성은 중의원과 참의원, 양원에서 모두 갖춰졌다.

그러나 개헌을 위한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무엇보다 속칭 아베파로 분류되는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인 세이와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의 미래가 불투명하다.

아베파는 현재로선 일치단결하여 구성원의 이탈을 막으면서도 아베의 국장(國葬)이 치러질 때까지 회장직을 공석으로 둔 채, 시오노야류(塩谷立)와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두 회장 대리가 운영하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한 듯하다.

아베 사망 직후에는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할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되었지만, 여러 반발에 부딪히자 내분을 수습하고 국장까지 시간을 벌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아베파가 차기 회장을 무사히 추대하고 결속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당내 제2, 제3, 제4의 파벌 간 합종연횡이 어떻게 진행될지도 중요한 변수이다.

특히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가 이끄는 ‘고치카이(宏池会)’는 자민당 내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총리를 5명이나 배출한 명문 파벌이지만, 파벌의 크기로는 모테기파(茂木派·54명), 아소파(麻生 派·49명)보다도 열세(44명)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시다 총리가 당내 파벌들 사이의 힘의 균형을 얼마나 절묘하게 활용할 수 있을지 그 정치력이 큰 시험대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당장 8월에 있을 내각과 자민당 인사를 어떻게 하느냐에 귀추가 주목된다. 특히 아베의 친동생이자 현재 방위 대신인 기시 노부오(岸信夫)와 아베의 사상을 선명하게 계승하면서 대중적 인기도 높은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현 자민당 정조회장 같은 정치인을 어떻게 처우할 것인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아베의 불행한 죽음으로 그에 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평가가 이뤄지기보다는 연민과 동정의 마음이 더해져 아베가 추구하고자 했던 ‘수정주의적 보통국가’ 노선을 지지하는 여론도 고조되어 있느니만큼 헌법 개정을 위한 사회적 분위기와 국회 구성 같은 조건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무르익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일부 한국 언론들이 보도하듯이 기시다가 본래 본인이 추구해 온 온건한 국제주의적 노선을 실행해 나가면서 한일관계도 자연스레 개선될 것이란 희망을 갖기엔 자민당 안팎의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겠다.

아베 사후 윤석열 대통령이나 한국의 외교 당국이 보인 모습에 대해 국내에선 여러 반발의 목소리도 높았지만, 외교적으로는 필요한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윤 대통령이 직접 아베 총리에 대한 조의를 표한 것이나, 박진 외교부 장관의 방일로 기시다 총리와의 면담이 성사되면서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이 된 부분도 평가할 만하다.

다만 조문 정치로 한일관계를 회복하기에는 돌아온 길이 너무 멀고,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까지 여러 위험요소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현실도 바뀐 것은 없다.

특히 강제 징용 피해자 판결과 관련된 이른바 ‘현금화’ 문제의 수습 없이는 한일관계 회복이 실질적으로 어렵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일관계 개선의 의지가 뚜렷한 윤석열 정부에게 우리 국민들 사이에 현금화 문제의 해 법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것은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 국민들 사이에 한일관계 회복의 필요성에 대한 회의감이 팽배하게 된 것이 더욱 문제이다.

이는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에서도 이미 지난 수년간 관찰되고 있는 현상으로 어느 한쪽만을 탓하기에는 누적된 세월의 무게가 꽤 크다.

더군다나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일본이 따라잡아야 하는 선진국이거나 상호보완적인 협력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왜 필요한가 하는 의문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게다가 이번 아베 피격 사건으로 일본 사회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이 더욱 부정적으로 된 측면도 있기에 더 이상은 한일관계가 마땅히 개선되어야 한다는 식의 당위론만으로 국민 여론을 되돌리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 정부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한일관계의 새로운 장을 쓴다는 각오로 매우 현실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현실적인 접근이란 한일협력을 통해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부분이 무엇이며 그런 이득을 얻기 위해 발생하는 비용과 위험부담은 무엇인지에 대해 객관적이고도 타당한 분석을 국민에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중 전략 경쟁의 심화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세계 경기 침체와 북한의 끊임없는 도발 등 지금 대한민국호(號)는 세력 재편과 질서의 재구성을 요구하는 중대한 국면을 통과 중이다.

이러한 국면에 일본과의 관계를 계속 어렵게 가져가는 것은 우리 국익에도 큰 위험요소이지 않을 수 없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한국이 얻을 수 있는 것 그리고 얻어내야 할 것들을 가지고 국민들을 설득해 나가야 한다.

지나온 세월보다 앞으로 갈 길이 더 먼 양국관계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 국민의 이해와 지지를 얻으며 관계 개선으로 나아가기를 주문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