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부소산성을 걸으면서
기고 / 부소산성을 걸으면서
  • 김인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04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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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희 (칼럼니스트)
김인희 (칼럼니스트)
김인희 (칼럼니스트)

[시정일보] 부소산성을 걸을 때마다 옷깃을 여민다. 부여에 살면서 부소산을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오솔길에 접어들 때 어김없이 숙연한 마음을 갖는다. 백제 왕궁의 수비성이 간직한 숭엄한 기운과 백제 후예의 혈맥을 타고 흐르는 유전자가 만나 하나 되는 의식이다.

부소산을 향하는 길을 따라 양쪽에 소나무가 도열해 있다. 그 길을 따라 처음에 만나는 삼충사에서 백제의 세 충신 성충, 흥수, 계백을 만나고 깊은 사색에 잠기곤 한다. 승리에 도취한 왕에게 적극적으로 간언하여 옥에 갇히고 죽는 순간까지 백제의 앞날을 걱정했던 충신과 나당연합군에 맞서기 위해 처자를 칼로 베고 황산벌로 달려간 백제의 마지막 장군을 생각하면 목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른다.

삼충사에서 부소산 정상으로 가는 초입은 계절마다 나무들이 연출하는 경관이 감탄을 자아낸다. 부소산성은 사계절 내내 신비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호흡이 가빠질 즈음에 우뚝 서 있는 정각 영일루를 만난다. 백제시대 왕과 가족들이 새해에는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부소산성은 백마강이 반달처럼 휘돌아 흐르고 북쪽은 경사가 급하여 왕궁의 수비산성으로 완벽하다. 백제시대 왕궁으로 관북리 유적지를 조사하고 연구하는 데 역사적인 근거가 충분하다. 반월루 광장에 이르러 동북쪽으로 내려가면 태자골이 나온다. 백제시대 태자들의 산책로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태자골에 아담한 정자 궁녀사가 있다. 궁녀들의 넋을 가장 잘 위로할 수 있는 이가 태자가 아닌가 안심한다.

궁녀사에서 낙화암으로 향하여 걷는 걸음은 천근만근이다. 낙화암은 백마강을 향하여 깎아지른 절벽이다. 낙화암의 전설이 된 백제의 여인들, 나당연합군의 치욕에 짓밟히지 않고 죽음으로써 백제 여인의 정절을 지키고자 했던 선홍빛 꽃이었다. 백제의 하늘에서 일제히 물속으로 자진한 슬픈 별똥별이었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 떨리는 음성을 가슴으로 듣는다.

낙화암에서 돌아오면서 우리나라 오천 년 역사를 생각해 본다. 최초의 국가가 멸망하고 다시 국가를 건국하고 도돌이표를 연주하듯 이어온 반만년 역사 속에서 유독 백제의 멸망에 대해 휘두른 승자의 무자비한 채찍에 몸서리친다.

부소산성을 걷는 것은 어쩌면 천 사백 년 전 백제시대로 가는 타임머신에 탑승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길섶에 핀 작은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조차 그 생명을 백제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왔을지도 모른다.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서 귀를 쫑긋 세우고 도망가는 다람쥐의 조상도 백제시대부터 이어왔는지도 모른다.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에 가고 별나라에 가는 시대에 타임머신을 타고 역주행하면서 독백한다. 온고지신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