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 #2 왕과 히자마즈리 문화
공무원의창 #2 왕과 히자마즈리 문화
  • 시정일보
  • 승인 2023.05.17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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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전 마포구 국장
양승열 전 마포구 국장

[시정일보] “손님은 왕이다.”

자본주의의 속내를 이만큼 잘 드러낸 말이 있을까? 인구에 회자하기를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곳이 한국이고 돈만 있으면 가장 살기 좋은 나라 또한 한국이다.”라는 말. 19세기 철학자들 중 눈이 맑은 일부는 자본주의의 성장을 보며 미래의 세상에 사람들이 가장 추앙하는 사상은 신도, 사람도 아닌 상품(물질)이 될 것이라며 물신주의(物神主義)를 예견했다.

30년 압축 성장의 결과, 한국은 근대적 정신의 뿌리를 향유하지 못한 채 돈과 성장의 위력에 휩쓸렸다. 한국 특유의 갑질 문화와 특정 업장에 대한 별점 테러, 인스타그램에 넘실대는 플렉스(Flex) 문화는 중국 또한 예외가 아닌데, 두 나라 모두 짧은 기간 고도성장을 이루었다는 특징이 있다.

2019년에 위생과장을 하면서 나는 별별 민원을 다 접했지만, 그중 단연 으뜸은 음식점을 상대로 ‘행정처분’을 요구하는 민원이었다. 민원 내용은 타당한 것들도 많았지만,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보복심에서 비롯된 것들도 많았다. 민원이 접수되면 관할 기관에선 응당 사안을 파악해야 하는데, 이럴 때 식당을 하시는 분들이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머리카락이 들어갔다거나, 식중독을 일으킨 경우, 잔반을 사용한 경우 등이 사실이면 모두 처분 대상이다. 문제는 법을 악용하는 요구도 많다는 점이다. 만일 나 같은 경우, 머리카락이 음식에 들어갔다면 그 음식을 바꿔 달라고 하고,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민원을 제기할 것이다. 하지만 일부 민원인은 현장에서 그걸 탓으로 삼아 업주에게 뒷돈을 요구하다가 안 돼 민원을 제기하기도 한다.

2019년 4월에 수산물시장에서 회를 떠서 2층 식당의 상차림으로 음식을 먹었는데, 배탈·설사 등 식중독에 걸렸다는 민원이 접수되었다. 하지만 해당 음식물에 대한 수거·검사 결과(서울시보건환경연구원)는 민원 내용과 달랐다.

현장에서 확인한 내용은 민원인들이 가져온 양주에 상 차림비를 받고 밑반찬(김치・무생채・상추・계란찜・장류 등)과 소주를 제공했으나 밥이나 찌개는 제공한 사실이 없었고, 이 식당에 오기 전 이웃한 지역에서 김치찌개와 순댓국 등을 배불리 먹고 2차로 와서 먹은 것이었다. 평소에도 상차림 비용을 적게 받는 등 잘해 줬으나 이날은 뭔가 기분이 뒤틀려 이른바 갑질성 민원을 제기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며칠 뒤에 또 수산물시장에서 회를 먹고 배탈 났다는 민원이 제기돼 나가 보았다. 진실은 손님이 뒷돈을 요구하다 안 들어주니 민원을 제기한 것이었다. 이럴 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정말로 그 식당에서 먹은 음식으로 인해 식중독에 걸렸다면 당연히 문제 삼아야 하겠지만, 배가 아프다고 왜 식당 업주를 겁박해 뒷거래하려고 하는가?

공무원 사칭 범죄도 있다. 그해 7월 점심을 먹고 직원들과 옹기종기 커피를 마시는데 식품위생팀 L주임이 대뜸 내게 묻는다. “과장님, 어제 저녁 상암동으로 식사 가셨습니까? ○○식당 사장이 어젯밤에 위생과장이란 사람이 와서 행패를 부렸다면서 내일 찾아오겠다고 합니다.”

난 차분하게 말했다. “제발 찾아오시라고 하세요. 나도 그 내막이 정말 궁금하네요. 요즘도 관직 사칭하는 인간들이 있다니….”

이와 반대로 음식 서비스업의 초보적인 자질도 갖추지 못한 업체도 있다. 그해 초겨울 저녁이었다. 직장 인근의 스시집에서 직원 셋과 초밥을 먹는데, 서비스로 준 병어 무침에서 호치키스(스테이플러) 알이 입에 걸리는 게 아닌가. 조용히 종업원에게 얘기했더니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철심을 받아 들고 사라진다. 마치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러세요?’라는 행동이다.

기가 막힐 노릇. 내가 바로 관할 구역 현직 위생과장인데…. 이 집이야말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내가 바란 건 소박한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정중한 사과 한마디였다.

2012년 연말엔 승진한 S주임의 승진 턱으로 성산동에서 탕을 먹었다. 그런데 물미역 줄기에서 노란 고무 밴드가 통째로 나오는 게 아닌가? 서빙하는 분에게 조용히 얘기를 하였고 사과를 하겠지 했더니 웬걸, 주방에서 나온 분은 변명만 하다 사라진다. 이런! 내가 음식점에 대해서 너무 관대한가. 왜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으려고 하는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위생과장의 엄정한 업무 집행을 보여 줬어야 했던 것 아닌가?)

9년 전에 읽은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에서 남편을 주인으로 섬기는 ‘히자마즈리(무릎 꿇기) 문화’에 관한 대목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일본에서 황혼 이혼이 점점 늘고 있다는 뉴스를 오래전 접한 적이 있는데, 보수적인 일본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한 복종 문화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참고 살던 여성은 “늙으면 두고 보자!”며 황혼을 기다려 일생의 과업을 해치운다.

손님이 왕이라고 하지만, 직원 또한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자녀고, 업주 또한 우리의 부모님이다. 모두 존중받아야 한다. 손님과 업주, 직원 모두 정당하게 요구하고 당당할 수 있어야 한다. 업주는 사명감으로 위생 청결 등의 준수 사항을 잘 지켜야 떳떳할 수 있다. 그래야 불순한 요구를 하는 손님에게도 당당하게 대응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잘못했다면 얼른 잘못을 인정하고 시정해야 한다. 정당한 고객의 요구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고객 또한 불결한 음식과 부당한 행태에는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 특정 국가의 서비스 질은 고객의 수준을 반영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식당도 고객도 모두 당당하고 품위 있는 음식 문화를 만들 수 있다.

손님이 왕이라는 말은 오래된 말이지만, 정말 손님이 왕일까. 적어도 왕 대접받으려면 왕다워야 하지 않겠나. 언감생심 세종이나 정조까지는 아니더라도 연산군, 광해군이 돼서야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