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 인문학광장 #3 가족
시정 인문학광장 #3 가족
  • 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 승인 2023.05.16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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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이재영 ㈜뉴런 대표이사
이재영 ㈜뉴런 대표이사

[시정일보] 칠순이 다 된 늘그막에 큰 병에 걸려서 온 가족에게 걱정을 끼치게 되었다. 심한 하혈로 들른 집 근처의 종합병원에서 대장암 3기 판정과 함께 네 시간에 걸친 대장 10cm 절제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하필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리던 시점이라, 혈액원 보유 혈액이 태부족하여, 병원에서 환자 가족에게 헌혈을 부탁했다.

‘지정 헌혈’ 제도라는 게 있는데, 환자의 지인이 어디서든 헌혈하고 헌혈증서 번호를 입원한 병원에 알려주면, 그만한 양의 혈액에 대한 우선 공급을 혈액원에 요청할 수 있단다. 내 수술에 당장 사용될 혈액은 이전에 이 병원의 다른 수술 환자 가족들이 헌혈하여 혈액원에 보관된 것을 급히 빌려 쓰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병원에서 다섯 명분의 헌혈을 요청해서, 나는 두 아들뿐만 아니라 체면 안 서게 며느리들에게도 헌혈을 시켜야 했다. 그러고도 한 명이 모자라 둘째 아들의 친구까지 동원했는데, 그 친구가 채혈이 끝나자 졸도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수술은 잘 되었지만, 퇴원 후에도 항암치료센터가 있는 다른 병원에서 2주일마다 2박 3일간 입원하여 항암제 주사를 맞아야 했다. 이렇게 열두 번을 치료받고 타 장기에로의 전이가 없으면 완치 판정을 받게 된다.

인천의 모 대학병원에 입원했더니, 6인실인데 내 병상 좌우와 통로 건너 세 개의 병상에도 환자가 들어차 있다. 커튼으로 구획된 칸막이다 보니 어떤 병상의 얘기든 어느 정도는 엿들을 수 있다. 내 우측에는 팔순의 노인이 입원해있는데, 할머니가 보호자로 함께 숙식하고 있었다.

밤에 통증에 시달리며 신음할 때면 잠을 설쳐 짜증스러웠지만, 낮에 휴게실에서 60년을 해로한 노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보노라면 참지 못한 내가 되레 민망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병명이 췌장암이고 수술 후 다섯 번째 항암치료를 받으러 왔다고 했다. 수술은 잘 됐다지만, 췌장암은 다른 장기로 전이가 잘되고 완치율이 극히 낮은 암으로 알려진 병이라, 혹시나 해서 매우 안타깝게 여겨졌다.

통로 건너 맞은편에는 내 나이쯤 되어 보이는 몹시 수척한 환자가 있다. 말수도 없고, 겨우 일어서서 비척거리며 몇 걸음 걷다가 도로 주저앉는 게 운동의 전부다. 무슨 병인지 몰라도, 회진 의사의 특별한 지시가 없는 것으로 보아, 회복될 희망이 없는 것 같다.

아침 일찍 부인이 와서 살펴보고 조용히 얘기도 나누며 몇십 분쯤 머물다 가는데, 옷차림이나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어디 힘든 일터에 나가는 눈치다. 병든 남편 뒷바라지하며 대신 돈 벌러 다니는 그 부인이 무척 안쓰러웠다.

맞은편 우측엔 50대 중반의 체격 좋고 스포츠머리의 멀쩡한 것 같은 환자가 입원해있다. 자세한 내력은 모르겠지만, 보살님이라는 중년의 여자가 떡 보따리를 들고 면회 와서 거사님이라고 불렀다. 함께 와서 병원 입구에 있다는 다른 보살님과 거사님이 핸드폰으로 큰 소리 내어 웃으며 통화하는 소리가 다 들렸다. ‘코로나 19’ 때문에 면회는 한 명만 허용된다.

그런데, 한밤중 조용한 시간에 거사님이 어떤 간호사를 불러 소곤소곤 얘기하며 떡을 나눠 먹었다. 솔직히 볼썽사나웠다. 그랬는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거사님이 침대째 사라지고 없다. 아마도 중환자실로 옮겨간 듯싶다.

맞은편 좌측에는 만성 골수암 환자와 그를 간호하는 어머니가 함께 있다. 한번 입원하면 며칠씩 걸린다는 항암치료를 벌써 19년간이나 받고 있다고 한다. 낼모레가 서른다섯 살 생일이라니, 중학교 3학년인 열여섯 살에 발병되어 지금까지 치료받으며 중년의 총각이 되었다는 말이다.

환갑이 다 된 모친은 어렵게 살아온 풍상의 흔적이 얼굴에 배어있다. 입담이 걸쭉하여 여장부다운 느낌인데, 오래 다니다 보니 병동의 온 동네 반장 같은 인물이 되었다. 다행히 최근에 병의 증상이 전보다 많이 호전되어 며칠 후면 퇴원할 거란다.

그동안 아들에게 지극정성을 바쳐 온 어머니의 거룩한 희생이 헛되지 않고 보상받게 되어 다행이다 싶다. 내 왼쪽의 50대 중반 환자는 조직검사 결과 간암으로 판정되어 서울의 유명한 병원으로 옮겨 수술받을 예정이란다.

그런데도 담배를 끊지 못하겠는지, 환자복 차림으로 자주 어딘가 나가서 몰래 피우고 들어온다. 동네 반장인 맞은편 아주머니가 야단을 쳐도 막무가내다. 그의 작은아들이 와서 의사도 만나 보고 치료비 지급과 퇴원 절차를 밟고 있다.

그는 혼자 사는지, 전에 오밤중에 집안에서 쓰러졌을 때도 작은아들이 열쇠공 불러 문 따고 들어와 자기를 입원시켜 살았다며, 아들 자랑이 늘어진다. 그런데, 대기업에 다닌다는 큰아들은 일이 바쁜지 얼굴도 비치지 않는다.

가족이 뭔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보면 실감하게 되는 것 같다. 짝이 된 남녀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가족이 생기는데, 늘 함께하는 임의로운 존재라서 나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내왔다. 그러나 이렇게 중환자로 입원하여 다른 환자 가족들의 면면을 살펴보게 되면서 내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평소에 무심했던 가족으로부터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헌혈이라는 도움을 막상 받고 보니, 두 며느리는 물론이고 아들에게도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 하루라도 빨리 완치되어, 이제부터는 소중한 내 가족에게 더는 걱정 끼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건강에 각별히 유의하며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