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 창#4 이제는 고등고시(高等考試)를 폐지해야 할 때
공무원의 창#4 이제는 고등고시(高等考試)를 폐지해야 할 때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5.22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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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공무원 채용제도는 그 뿌리가 고려 초 광종(光宗)의 ‘과거제도’에 닿아 있다. ‘직업공무원제’는 역량과 인품 있는 이에게 공무담임권의 기회를 부여해 능력으로 자아실현하고 공공선을 통해 국가 사회에 이바지하는 ‘경력직 공무원 제도’를 말한다. 공무원 공개 채용시험제는 9급·7급·5급 등이 있고, 특히 고등고시는 행정고시·기술고시·입법고시·외무고시·법원행정 고등고시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제도는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환경에 걸맞게 변화해 왔다. 해당 분야에 특별한 역량을 지닌 전문가를 영입하는 개방형 인사제도 등이 그렇다. 하지만 유독 5급 공채 시험만큼은 요지부동이다. 왜 그럴까? 한국전쟁 이후엔 국가 개발을 위해 우수한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지만, 지금 시대와는 걸맞지 않다. 오히려 이 제도의 특성으로 인해 인성과 역량이 검증되지 않은 부적합한 관리자가 양산되고, 이로 인해 조직의 생산성이 저하되고 서비스의 질 또한 추락하기도 한다.

요즘 청년들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런데 9급·7급·5급으로 임용하는 것이 적절한가? 고등고시를 통해 임용되면 지방정부의 경우 기초는 과장급, 광역은 팀장급으로 시작한다. 9급에서 5급으로 가는 기간은 빨라야 30년이다. 내 경우는 31년이 소요되었다. 공부 머리, 즉 암기 능력과 자격증 몇 개로 30년의 차이가 나는 출발점에 서게 된다.

2004년부터 미국의 예비 대학 수학능력 평가 방식의 논리력, 상황 판단 등 영역별 평가의 PSAT(공직적격성 평가)가 도입됐었지만, 이 역시 학원과 문제지로 수련하는 책상 공부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5급 한 자리면 하위직 4자리가 생긴다. 그만큼 연봉의 격차도 크다. 물론 머리 좋은데 일까지 잘해서 조직의 역량이 효과적으로 쓰인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게 공직사회의 공공연한 평가다.

5급에서 9급으로 이어지는 명령계통은 융통성 없는 위계조직의 꼴을 하고 있다. 지금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국정의 씨줄과 날줄을 짜고 위에서 지시하면 아래에선 집행하는 권위주의 개발독재 시대가 아니다. 일사불란한 명령체계가 국가경쟁력을 담보하는 시대가 아님은 바로 옆 나라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에서도 검증된 것 아닌가. (현재 일본의 최대 고민 중 하나는 ‘사고하지 않는’ 정부조직의 혁신 문제다.)

1997년 IMF 구제금융 이후 노동의 비정규직화, 외주화로 인해 이제 정규직 공직자는 청춘의 열망하는 꿈의 직장 중 하나가 되었다. 경쟁이 치열한 만큼 등용되는 인물의 경력과 면면도 놀랍다. 하지만 고등고시 5급 출신과 7・9급과의 처우 차이는 너무나 큰데, 그 근거가 과거와 달리 매우 미미해졌다는 점이 문제다. 행정 수요자인 국민 입장에서는 고등고시 출신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역량 있고 따뜻한 가슴을 가진 공직자면 되는 것이다.

고등고시 5급에 대한 현장의 여론도 흉흉할 때가 많다. 36년간 현장에서 수많은 고등고시 출신들을 상대하면서 느낀 점은 그들은 인성은 차치하고라도 현장과 밑바닥 사정을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도 있으나 일찍이 우월의식과 선민의식에 찌들어 등용 초기부터 조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완장’이 되기도 한다.

나는 고등고시제도를 점진적으로 줄여 나가기를 바란다. 이에 따라 내부 승진의 기회는 더 많아질 것이며, 조직 내의 위화감 또한 해소될 수 있다. 적어도 공직에 대한 호감도는 지금보다 치솟을 것이며, 고등고시를 거치지 않았으나 현장에서 바로 전력화될 수 있는 더욱 우수한 인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청년들의 공직에 대한 쏠림 현상이 더 심해질까 걱정마저 든다. 고등고시가 없어도 7급 공채 제도가 있으니 그 기능과 역할을 충분히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일선 지방행정의 경우, 시민을 직접 상대하는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 이른바 경험칙. 그런데 서울시 등 광역지자체의 경우 실·국·본부장 대부분이 고등고시 출신이다. 새파란 고시 출신 후배의 기동력과 순발력 등을 활용한다는 명분으로 주요 직위를 독점하면서 그들만의 리그가 시작된다. 4급부터는 아예 라인을 챙기며 밀어 주고 끌어 주는 기묘한 갈라파고스 생태계가 형성된다.

만약 5급이 아니라 6급에서 공직을 시작해 현장의 실무와 서민의 애환을 직접 배우며 차근차근 성장한다면 어떨까? 그들이 선출직 공직자나 단체장, 중요한 기관장이 되었을 때 국민과 더 가깝고 실용적인 정책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시스템은 혁신에 저항한다. 그 저항의 핵심은 사람의 기득권이다. 기득권을 허물고 개혁에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공론과 위로부터의 혁신이다. 뜨거운 공론(公論)의 힘을 동력으로 해서 인사혁신처 등의 권한 있는 기관의 전향적인 결단으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공직자의 역량과 의식은 과거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옛날처럼 이도 저도 할 것 없으면 들어오는 곳이 공직사회가 아니다.

국민에게 수준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선 공무원이 스스로 품위와 긍지를 느낄 수 있도록 처우해야 한다는 인식은 대략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 같다. DJ 정부 때 지금은 고인이 된 김광웅(金光雄) 대통령 직속 중앙인사위원회의 초대 위원장(1999~2002)이 주도해서 공직자 보수체계를 대폭 손질했다.

개선된 처우만큼 유능한 인력들이 쉼 없이 공직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나 후배들의 미래에 대한 담보를 훼손한 박근혜 정부의 ‘공무원 연금 개악’은 구시대적인 공직자관의 결과. 공무원이 매월 떼는 기여금이 얼마인데 뭘 좀 알고 한 것인지?)

송호근은 『명강』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대학 입시와 더불어 한국 사회의 정의를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가 고등고시예요. 행정·사법·외무고시입니다. 이게 변하면 한국 사회의 정의는 변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자리 잡고 있어요. 왜냐하면 과거시험 전통 때문에 그래요. 조선시대의 과거제도가 500년 동안 시행됐습니다.”

다음은 2019년 현장에서 벌어진 사례를 직접 들은 이야기다. 한 고등고시 출신의 부사장이 승진 심사에서 떨어진 서열 빠른 팀장들을 한 명씩 불러 면담했다고 한다. 그는 한 여성 팀장을 앉혀 놓고 그의 졸업 학교와 미혼 등의 이력이 담긴 신상 자료를 보면서, 자신은 승진을 시킬 수도, 떨어지게 할 수도 있는 생사여탈권을 쥔 권력자라 말했다고 한다. 불려갔던 여성 팀장님의 당시 나이는 59세, 부사장의 나이는 51세였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생부를 흔들어 대며 직원의 인격을 모독한, 그 자리에 걸맞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 역시 직간접적으로 그에게 여러 번 당한 적이 있다. 막강한 힘을 가진 고위직의 한마디가 직원들에게는 큰 힘이 되기도, 평생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기도 한다. 인성과 역량을 검증할 수 없는 구시대적 5급 고등고시의 한 자리를 없애면 4명의 실력자를 뽑을 수 있다. 이제야말로 고등고시를 폐지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