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 창 #5 미혹되지 마소
공무원의 창 #5 미혹되지 마소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5.24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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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13년 전 5월의 햇살이 좋을 때였다. 고양시 덕양구의 화정 로데오거리에서 책을 몇 권 사서 나오는데, 까만 가방을 멘 여성 2명이 내 앞에 섰다.

“아저씨, 인상이 좋고 눈이 참 맑으세요. 그런데도 수심이 가득한데, 저희가 도와드리고 싶어요.”

그럼 요 앞 공원에서 얘기하자고 했더니 음료수를 사 달란다. 인근의 레스토랑에서 팥빙수, 커피를 시켰고 난 늪 속으로 서서히 끌려 들어가 녹아내렸다.

아저씨가 집안의 씨앗 자손인데 조상들은 해코질 하지 않지만 좋은 데로 가지 못하고 부모님과 조상님들이 모든 업을 나한테 부여했단다. 그분들이 구천에 떠돌며 씨앗 자손 주변에 머물면서 근심과 걱정이 집안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며 더 방치하면 큰일 난다고 했다. 마침 오늘이 길일인데, 원당 성소에 가서 치성을 드리자며 나를 잡아끌었다.

홀린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그들의 선의에 대한 기대감과 호기심이 나를 움직였다. 그들은 가까운 거리임에도 연신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버스를 두 번이나 바꿔 타고 이른 곳은 문패도 없는 5층 빌라였다. 선방은 4층에 있었다. 꺼림칙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어쨌든 내가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선방의 문을 열었다.

남녀노소 한 무리의 눈길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을까. 그들 눈엔 넋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일제강점기 징용에 끌려갔다 돌아온 자들처럼, 80년대 전기고문의 후유증으로 초점마저 사그라지던 눈빛들처럼. 그들 중 일부는 날 보자 익숙한 듯 일어나서 날 선방으로 끌고 가서 상담했다.

20분 정도 흘렀을까. 과일 상을 차려 놓고 기도를 하자고 했다. 치성(상)을 올리기 위해 지닌 돈(10만 원)을 내라고 했다. 기도할 때 뭐 해 달라고 주문하지 말고 ‘어머니, 아버지, 조상님 원한, 괴로움, 상처, 슬픔, 모든 짐 모두 털어 버리시고 이제 구천을 떠돌지 마시고 좋은 데(극락)로 가시라’고 빌라고 한다. 내게 흰 두루마기(소복)를 입히더니 법배 4배(손동작 상하)에 이어 좌우로 이동하며 수없이 절을 했다.

그들의 주문은 많았다.

“오늘부터 21일간 주의 사항 6가지입니다.”

1. ‘~죽겠다.’라는 말하지 마라. (실수로 했을 때는 ‘죄송합니다.’)

2. 오늘 이 건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부정 탄다, 끝난 후엔 괜찮다)

3. 다리 꼬지 말고 떨지 마라. 뒷짐 지지 말고, 팔짱 끼지 마라. (복 달아난다)

4. 21일 동안 터 밟기(매일 여기 선방으로 와서 상담 후 귀가할 것). 오늘 정성으로 구천에 떠도는 조상님 누군가는 좋은 데로 가시지만, 대상이 여러 분이기 때문에 21일 동안 정성을 드려야 한 분 한 분 올라간다.

5. 문지방 밟지 마라.

6. 여기 올 때는 인근에서 만나 같이 들어와야 한다. 전날 사소한 꿈이라도 얘기해 달라. 미륵보살을 모신다. 삼척 **면 **리에 도장(연수원)이 있다고.

‘어머니, 아버지, 조상님, 원한과 괴로움, 상처, 슬픔, 모든 짐 모두 털어버리시고 이제 구천을 떠돌지 마시고 좋은 데(극락)로 가셔요’ 치성을 드리고 가려는데, 한 달간 꼬박꼬박 오란다. 물론 여기 올 때는 인근에서 만나 같이 들어와야 한다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마나님(마눌+하나님)에게 끝없는 추궁을 당한 끝에 자백해야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들은 대순진리회 포교원들이었다. 현실이 눈에 들어오자 화가 치밀었다. 그들이 준 전화번호로 전화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폴~(policeman)로 나가는, 당장 내 신상 명세 소각하고 다시 오라 가라 하면 너희들 모두 쇠고랑 찰 줄 알아라!”

그렇게 호통을 치고 나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봄 햇살에 마음의 빗장을 모두 열어 둔 결과였을까. 미혹되어 따라간 변두리 빌라의 4층 방. 그곳에서 그들은 그들의 ‘복낙원(復樂園)’을 꿈꾸고 있었다. 삶에 배신당하고 세파에 지친 방랑자들이 몸부림 끝에 도착한 작고 어두운 궁(宮), 어쩌면 그곳은 그들에게 바깥세상에 내몰려 도착한 막다른 골목일 수도, 아니면 영영 깨지 않는 달콤한 꿈결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반나절 동안 미혹되었고, 그들은 미혹된 끝에 신념화되었다. 인생엔 늘 안온한 허상과 참혹한 진실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가 있다. 영화 『메트릭스』의 전설적인 대사, “빨간 약 먹을래, 파란 약 먹을래?” 인생의 절반은 수행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우리, 미혹되지 않고 비록 아프더라도 차가운 현실을 걸으며 별을 헤아릴 수 있는 눈을 잃지 않기를. 미혹을 통해 새로운 지혜를 얻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