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 창#7 어떤 이들은 지하수를 닮았다
공무원의 창#7 어떤 이들은 지하수를 닮았다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5.2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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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1990년 즈음 종로에 근무할 때의 이야기다. 행정조직 업무는 반복의 연속이다. 물론 일을 반복하면, 해당 분야에 대해 깊이 알게 되고 업무 처리도 빨라진다. 조직 전체로 보았을 때 ‘효율적’일 순 있겠지만 당사자는 죽을 맛이다. 어제가 그제 같고 오늘이 어제 같아 세월의 시침은 내 사무실만 비껴가는 듯했던 그때, 새로운 업무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름도 생경한 하수과다. 하수과는 하수들이 근무하는 곳인가? 속으로 신소리를 주억댔지만, 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하수과는 힘없고 백 없는 직원들의 집합소였다. 일전에 인사팀장에게 편지로 업무 고충을 전달했는데 그분은 대뜸 그 내용을 인사팀원들에게 공개해 버렸다. 부서의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이 내용을 알고 있는 듯했다.

당연히 비밀을 지킬 것으로 생각하고 올린 고충이었다. 보안을 유지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내 글을 잘 쓴 글이라며 공개해 버린 것이다. 그 편지에 어디 좋은 내용만 있었겠는가. 내 책상 서랍엔 그때 그 편지의 사본이 남아 있다. 다시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그땐 참 푸르렀다. 세월 따라 자연히 쌓이는 먼지조차도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그땐 인사발령 방식도 무척 공개적이었다. 그 팀장 아래 늙수그레한 인사주임이 구내방송으로 인사발령 대상을 느릿느릿 호명하면 직원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사무실 귀퉁이에 걸린 스피커에 모든 정신을 집중해야만 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처사다.

하지만 어지간히 대가 셌던 나조차도 일제강점기에 출생신고를 하셨던 고참 어르신들께는 감히 어찌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때다. 새로운 업무는 지하수 출수량 조사였다. 1년에 2~3개월을 집중해서 진행해야 하는 고된 업무다. 당연히(?) 종로구에서 가장 멀고 수전도 많은 변두리가 내 차지가 되었다.

그 당시엔 업무용 차량은 언감생심 그저 걷고 또 걸어야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공중목욕탕의 탕에 들어가 방수배관에 순간유량계를 들이댔다. 양복을 걸치고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배관에 기계를 대고 있으면 목욕탕의 모든 나체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시내 복판에 있던 어떤 단체의 빌딩은 뒤뜰에 우물이 있었다. 우물은 바지랑대보다 깊어 사다리를 이용해 내려가야 했다. 언젠가 TV에서 탄광 노동자들이 갱도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적 있다. 그들은 승강대에 앉아 한도 없이 내려가며 멀어져 가는 하늘을 이따금씩 보았다. 뭐 그 일이 그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무거운 쇠뚜껑을 열어 20㎏의 초음파유량계를 메고 내려갈 땐 때로 공포심마저 들었다. 지하수 배관이 작은 것은 구멍에 순간유량계를 들이대면 출수량을 측정할 수 있었지만, 규모가 큰 것은 007가방처럼 생긴 초음파유량계를 설치하여 측정해야 했다.

출수량은 지하수 요금 산정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업자나 건물주 입장에선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매일 엄청난 물을 받아쓰는 목욕탕이나 수영장 같은 설비는 더더욱. 1990년대 중반까지는 공무원 안주머니에 흰 봉투를 찔러 주는 일이 예사였고, 거꾸로 공무원이 거마비를 요구하기도 했다.

하수과. 정말 힘없는 부서지만, 서민에게는 관에서 과금(課金)하는 공직자는 하늘이었으리라. 민간인들이 내게 어떤 식으로든 잘 보이려고 하는 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업무의 뒤란에도 부정의 싹은 자라나겠구나.’

업체 사장들은 직원을 구워삶으려 들고, 심장이 두꺼운 직원은 푼돈의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고작 유흥비에 탕진해 버리는 악순환의 늪 말이다. 매일 익숙해지지 않으려 노력하며 자기 관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TV에도 신문에도 나오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세상과 삶을 지탱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는 평생 버려진 아이들을 후원하며 그들이 대학을 가고 취업할 때까지 속앓이를 하고, 또 어떤 이는 해외로 밀반출된 도난 문화재와 일제강점기 시절 빼앗긴 문화재를 찾기 위해 생을 바친다.

우리 동료 중에도 야학 봉사를 하는 이가 있다. 그들의 삶은 뭐라고 해야 할까. 그건 마치 지하수와 같다. 눈에 띄지 않지만 늘 흐르고 있으며 겨울을 견뎌 뿌리를 적셔 마침내 봄꽃을 피우는 지하수.

꼭 이렇게 훌륭한 일로 생을 빛내는 분들만 이런 몫을 해내는 건 아니다. 역한 분변 냄새를 참아 가며 정화조를 흐르게 하는 이들이 있고, 매일 새벽 대학로 광장에서 밤새 (비둘기에게 줄 요량으로?) 무언가를 잔뜩 토하고 돌아간 이들의 흔적을 지우는 사람도 있다. 공직자들이 하는 일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