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나의 독립을 외쳐본다
특별기고/ 나의 독립을 외쳐본다
  • 이상진(한반도통일지도자총연합 중앙회장)
  • 승인 2024.04.04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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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진(한반도통일지도자총연합 중앙회장)
이상진 중앙회장

[시정일보] 독립문 앞에 섰다. ‘코리안드림 시민걷기’모임에서 3월에는 독립운동을 기념하고 마음에 새기자는 의미에서 서대문형무소에서 탑골공원까지 걷기로 한 것이다. 독립문은 독립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 독립협회가 주도가 되어 파리의 개선문을 모티브로 서구적 근대화를 지향하는 시민운동의 상징이며 대한제국의 상징이기도 했다. 

독립문을 계획하고 디자인한 사람은 서재필이다. 임오군란이 일어나던 1882년 그는 증광시에 급제하여 교서관부정자라는 관직에 오른다. 이때 그는 서광범과 김옥균을 만나 교류하면서 개화사상에 눈을 뜬다. 1883년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의숙에 유학을 하고 토야마하사관학교에서 군사지식을 배우고 귀국해서 병조의 조련국 사관장이 된다. 

우리역사에서 1882년은 매우 중요하다. 이 해 5월에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었는데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조약을 맺은 것이다. 이로 인해 조정은 청에 더이상 사대관계를 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청은 안남국(베트남)을 프랑스에 내주고라도 조선은 속국으로 남기려 했다. 이럴 때 마침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은 3000명의 군대를 보냈고 대원군을 납치해 갔다. 그리고 조청상민수륙장정이라는 조약을 맺어 조선을 속국으로 명시했다. 이로 인해 국내에 화교상권이 생겨났고, 조정의 개혁세력은 모두 물갈이 되었다. 이후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갑오경장, 청일전쟁, 을미사변, 아관파천, 러일전쟁, 을사조약,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스펙터클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 조선 왕조는 임오군란을 기점으로 사실상 멸망으로 가는 회생 불가의 상태임이 대내외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시기를 거치면서 개화를 꿈꾼 사람들은 확실한 개혁, 갑신혁명을 꿈꾸게 되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전 같은 해 청.프전쟁이 일어나 청은 조선 주둔군 반을 빼서 안남으로 보냈다. 청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일본군의 협력을 얻어 거사를 일으켰지만 개화파의 힘은 청군을 대항하기엔 역부족이어서 혁명은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남겨진 가족과 친인척이 모두 몰살당했고 자식은 굶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옥균은 고종이 보낸 암살자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 시신은 잘려져 팔도로 보내졌고 머리는 한강변에 효수되었다는 것도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다. 10년 동안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고 청일전쟁이 일어나던 1894년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과 친척인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과 결혼하여 미국 주류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1895년, 서재필은 10년만에 미국시민권자인 의사가 되어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모델적 인물이기도 하다. 조정의 중추원 고문 자격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의 관심은 시민의식 계몽이었고 독립정신 고취였다. 

청일전쟁 후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 1조에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 아닌 완전한 독립국임을 명시함으로 국제법상 완전 독립주권국임을 명시했다. 이러한 국제적 환경하에서 서재필은 실질적인 힘을 가진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며 우선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과 영은관을 허물고 그곳에 조선이 자주국임을 상징하는 독립문과 독립관을 세우고 독립신문을 발행했다. 

독립은 타국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오는 것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국가든 개인이든 스스로를 지킬 수 있고, 당당히 맞설 수 있는 힘과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자신의 확고한 신념이나 과학적 지식이 없이 남의 이야기나 주장에 휩쓸려 다닌다면 그것은 독립된 자아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예속된 것이다. 

독립문 앞에서 서재필과 이 나라 독립을 위해 애쓰다 쓰러져간 위인들을 생각하며 나의 독립을 외쳐본다. 

※ 작가소개: 이상진은 현재 한반도통일지도자총연합의 중앙회장을 맡고 있으며 통일한국을 이루기 위해 국민적 계몽과 교육운동을 전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