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칼럼 / 가난은 죄가 아니고 단지 불편할 뿐일까? 
시정칼럼 / 가난은 죄가 아니고 단지 불편할 뿐일까? 
  • 권 혁 중 논 설 위 원
  • 승인 2024.04.11 11:45
  • 댓글 0

권 혁 중 논 설 위 원
권 혁 중 논 설 위 원
권 혁 중 논 설 위 원

[시정일보] 우리 국민은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 엔데믹으로 접어들면서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국민(지역주민)이 고대했던 생활경제는 좋아지지 않고 있다. 전 세계가 같은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만 이 고통을 국민(지역주민)에게 주는 것 같은 느낌은 왜일까? 간디가 말했다던가. ‘사람의 욕망은 한도 끝도 없다. 99개를 가진 부자가 아등바등 1개를 더 채워 100개를 만들려고 한다’라고. 가난을 벗어나려고 더 열심히 일한다. 자식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큰 결심이 무너지지 않도록 일하고 또 일한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 다만 조금 불편할 뿐이다. 아니, 솔직히 많이 불편하다. 오늘날엔 가난이 불편함을 넘어 고통이다. ‘인생은 돈이 전부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전부는 아닐지언정 큰 부분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돈이라는 것은 정해진 주인이 없이 돌아야 하는 것이다. 돈은 소유를 지시하기보다는 가치를 매개함으로써 인간관계를 맺어준다. 그래서 돈의 어원은 ‘돈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돈이 잘 돌면 재화도 공평하게 쓰이고 인간관계도 돈독해진다. 그러나 잘 돌지 않으면 불평이 쌓이고 불신은 커진다. 

지금 세태를 보면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에 있어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진리를 향하는 게 아니라 오욕을 향하고 있다. 가난은 그저 가난일 뿐이다. 죄도 아니고 치욕도 아니다. 누군가를 짓밟아야 내가 부유해진다면 차라리 못사는 게 낫다. 진정 가난한 자는 가진 게 적은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빈한한 사람이다.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세상 모든 곳이 내 거처이고 내 마당이 된다. 집착이 없으니 걸림이 없다. 무언가를 소유하면 할수록 집착은 커져만 간다. 

우리의 사고를 이분법적 논리로 만들어가는 것은 정치인들의 책임이 크다. 자신의 영예(榮譽)를 위해 국민(지역주민)을 현혹하는 온갖 공약(公約)을 쏟아낸다. 대학(大學)에서는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자세를 가장 큰 가치로 삼고 있다. 

또한, 논어 학이편(學而篇)에는 ‘子曰(자왈), 巧言令色(교언영색) 鮮矣仁(선의인)’이라 하지 않았던가. 풀이하면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교묘하게 말을 잘 꾸미고, 얼굴빛을 남 보기 좋게 꾸미는 사람은 인이 드물다’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뽑는 지도자가 국민(지역주민)의 생활경제를 얼마나 알고 있으며 이를 나아지게 하는 방안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가늠자를 만들어야 한다. 가늠자는 유권자인 국민(지역주민)이 만들어야 실효성 있고 공감하는 평가가 될 것이다. 당선되고 나서는 유권자의 생활경제는 도외(度外)시하고 자신의 영달(榮達)만을 추구하고 자신의 안정적 생활만을 영위(營爲)하는 사람은 절대로 리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유권자도 이런 부류의 사람을 지도자로 선택하는 일을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첨단 사회를 살고 있다. 세상에 일어나는 사건(일)을 즉각적으로 볼 수 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이라는 책속에 이런 글이 나온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다니는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 선택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가난은 우리가 태어날 때 품고 나온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난 고난이므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난은 ‘죄가 아니고 단지 불편할 뿐이다’라는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 생각으로 마음을 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