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남지 연가(戀歌)
궁남지 연가(戀歌)
  • 시정일보
  • 승인 2024.05.27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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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희 칼럼니스트

 

김인희 칼럼니스트
김인희 칼럼니스트

[시정일보] 필자의 부여부심(扶餘負心)은 하늘을 찌른다. 결혼 전에는 부여에 한 번도 오간 적 없었다. 결혼 후 부여에 살기 시작하여 올해 30년이 되었다. 필자가 태어난 고향보다 더 오래 살았고 앞으로도 부여를 떠날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 부여는 고향이나 다름없다.

흔히 부여하면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사비성(泗沘城)을 연상한다. 그리고는 이내 의자왕과 삼천궁녀를 소환하고 황산벌로 오천결사대를 진두지휘하며 말달렸던 백제의 마지막 수장(首長) 계백장군을 거론한다. 부여는 발길 닿는 곳마다 한(恨) 서린 곳이요 마지막 왕조의 설움을 품고 있는 도시이다.

부여에 살면서 필자에게 거룩한 사명감이 생겼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던 역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승자는 정복을 합리화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고 승자의 잣대로 재단하고 오명을 덧씌웠다. 필자는 끊임없이 독서하고 공부하면서 부여에 있는 백제 역사의 진실을 찾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국립부여박물관 전시실 해설 자원봉사를 하면서 단체 관람객들에게 백제의 역사의 진실을 전할 때 한층 더 큰 목소리로 역설했다.

필자는 궁남지를 산책하면서 천사백 년을 역주행하는 타임머신에 탑승한다고 여긴다. 궁남지(宮南池)는 백제 때 만든 인공 연못이다. 『삼국사기』 는 백제의 무왕 35년에 궁궐 남쪽에 이십 여리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물을 끌어다가 연못을 만들고 주변에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전한다. 궁의 남쪽에 있는 연못이라 하여 궁남지(宮南池)라 일컬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무왕의 탄생설화가 실려있다. 무왕의 어머니가 용을 품고 잠을 잔 후 무왕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궁남지 한가운데 있는 정자 포룡정(抱龍亭)은 역사를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

부여군에서는 궁남지 주변에 연지를 조성하고 연꽃이 만개하는 7월에 전국적인 축제인 부여서동연꽃축제를 개최한다. 축제가 열리면 천만 송이 연꽃이 피는 궁남지에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2024년 제22회 부여서동연꽃축제는 7월 5일부터 7월 7일까지 3일간 개최한다.

궁남지 포룡정
궁남지 포룡정

궁남지에 연꽃이 피면 무아지경이 따로 없다. 홍련의 빛깔은 태양을 닮아 붉게 상기되고 백련의 빛깔은 하얗게 달빛을 투영시킨다. 물 위에 떠서 핀 수련도 각양각색이다. 빅토리아 수련은 열대 지역에 서식하는 수생식물로 지름 최대 2m 정도의 거대한 잎과 향기로운 꽃을 가지고 있다. 거대한 잎은 어린아이를 거뜬히 떠받칠 수 있다고 한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궁남지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 깃든 곳이라는 대명사답게 연인들의 장소다. 사랑하고 싶은 연인들이 궁남지에 오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표어는 달콤하다. 궁남지 연지를 따라 산책할 수 있는 길은 여러 갈래다. 연지가 시골 논처럼 형성되어 있고 구분 지은 둘레는 산책로다. 연꽃을 보면서 산책하다가 곳곳에 있는 정자에서 쉴 수 있다. 궁남지 둘레에는 중앙에 있는 포룡정을 향하여 벤치와 그네가 곳곳에 있어서 산책과 휴식을 동시에 할 수 있다.

필자는 궁남지를 즐겨 찾는다. 생활 속에서 여백이 있을 때마다 발길이 향하는 곳이 궁남지이다. 연꽃이 핀 여름밤에 궁남지를 거닐다 보면 은은한 연꽃의 향기에 휩싸인다. 낮에는 연꽃의 빛깔에 매혹되고 밤에는 아름다운 빛깔이 뱉어내는 향기에 취한다. 궁남지 주변의 버드나무 가지마다 매달린 매미들이 일제히 합창할 때면 귀가 따갑다. 온갖 상념들이 얽히고설키어 복잡할 때도 궁남지를 찾는다. 연지를 산책하면서 생각을 비우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면 후련해진다. 무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을 때도 궁남지를 산책하면서 하늘을 향하여 간구한다.

궁남지의 가장 바깥 산책로를 선택하여 걸으면 절로 운동이 된다. 서쪽 끝에서 걷기 시작하여 반대편 끝에 다다르면 백제오천결사대출정상이 있다. 동상을 만든 조각가의 해설을 들었을 때 두 손에 힘을 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작가는 당신 생전에 그렇게 큰 동상을 다시는 만들 수 없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혼신을 다했다고 했다. 백제오천결사대출정상 앞에 서면 사비성이 함락되던 날의 절규가 들린다. 죽기를 각오하고 전쟁터로 간 계백장군과 오천 병사의 함성으로 전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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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되새긴다. 천사백 년 전 백제와 21세기 사이에 있는 필자는 누구인가. 필자의 혈맥을 타고 흐르는 백제의 DNA가 불끈하고 요동친다. 필자는 연꽃의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가 휘감고 있는 궁남지에서 왜 이토록 뜨거운 연가를 불러야 하는지 역사 앞에서 절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