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밑 정동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언덕 밑 정동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 방용식 기자
  • 승인 2008.03.13 15:30
  • 댓글 0

중구문화원, 향토사료 11집 ‘정동역사의 뒤안길’ 발간

중구 정동(貞洞)은 소박한 곳이다.

하늘을 찌를 듯 서있는 건물도 없고 분주한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덕수궁 돌담길을 시작해서 경향신문사까지 좁다란 길로 이어진 정동(貞洞)길은 따뜻한 봄 햇살을 한껏 맞을 수 있다. 그렇지만 100전 년 정동은 미국 대사관저와 러시아ㆍ영국대사관이 몰려 있어 총성 없는 정보전이 치러진 ‘정치 1번지’였다.

왜 정동이라 불렸을까. 옛 러시아공사관(일명 아관ㆍ俄館)이 있는 정동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貞陵)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정동은 구한말 영국과 미국 등 서구열강의 공사관이 집중된 외교타운이었고, 정동제일교회와 성공회성당 및 구세군본관 등 종교시설이 들어선 서양문물의 ‘대문’이었다. 또 배재ㆍ이화학당 등 개화교육의 요람지이며, 동시에 을사늑약(乙巳勒約ㆍ1905년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강제조약으로 조선병탄이 시초가 됐다)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이 소재한 곳이기도 하다.

정동은 개화기 초 ‘양인(洋人)촌’으로 불렸다. 서양 외국인들이 이곳에 많이 거주했거나 생활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곳에 공관과 학교, 교회, 병원, 호텔 등을 건립했고 정동은 근대교육이 시작된 배재학당(1885년 8월)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1896년 4월7일)과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1926년 2월16일), 첫 출판사(1889년 삼문출판사), 첫 여성병원(1888년 11월 보구여관ㆍ현 이대부속 동대문병원), 첫 민간병원(1885년 9월 정동병원), 첫 커피숍(손탁호텔), 첫 개신교회(1888년 9월27일 정동장로교회ㆍ현 새문안교회) 등 ‘최초’의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정동에 얽힌 이런 얘기는 중구문화원(원장 남상만)이 발간한 <중구향토사 관계 자료집> 제11집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정동, 역사의 뒤안길’을 소제목으로 단 이 책자는 중구문화원이 지난 1996년 서울 처음으로 중구향토사연구위원회를 구성, <중구향토사 관계 자료집> 제1집을 발간한지 12년 만이다. 당시 중구향토사연구위원회는 제1집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생지가 중구임을 밝히는 논문을 수록, 큰 반향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한편 제11집에는 정동뿐 아니라 서소문동, 순화동, 의주로1가, 충정로1가, 태평로 등 정동 부근 지역의 역사와 관련한 설화와 사료 등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