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6.25 우리는 잊을 수가 없다
분단의 6.25 우리는 잊을 수가 없다
  • 시정일보
  • 승인 2010.03.11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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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병 윤 논설위원

2010년 6월25일 우리 민족은 6.25동란 60주년을 맞이한다.
우리들은 전선에서 산화하신 호국영령 앞에 그리고 미국을 위시해 영국·태국 등 유엔 참전 16개국의 전사한 영혼에 명복을 빌며 16개국 우방국에 감사하자.

우리 민족은 일제치하 36년 동안 울분을 삼키고 갖은 수탈과 억압을 당하면서 살아오다가 1945년 8월15일 일본천황 히로히또가 연합군사령관 맥아더장군 앞에 무조건 항복문서에 조인함으로써 고대하던 8.15 해방을 맞이했다. 3.8선 이북은 소련이 지배하고 남한은 미군이 신탁통치에 들어갔다.
해방 후 조선제국은 남북으로 갈라지고 북한은 1948년 9월9일 건국하고, 남한은 1948년 8월15일 국가를 수립했다. 남북한사이 이념과 사상의 대립갈등으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대립격돌은 심각했다.

여수·순천 반란사건, 거창학살사건, 제주 4.3사건을 비롯해 송진우, 여운형, 김구 선생 등 훌륭한 애국지사가 무차별 암살됐다. 이때 김일성도당은 소련의 스타린과 중국의 모택동으로부터 남침점령작전을 승인받고 남한의 사정을 낱낱이 파악한 후 1950년 6월25일 새벽 전차한대 없고 정찰기 2대뿐인 대한민국을 전격 침공했다. 예상치도 못하고 대비도 없는 남한은 전쟁반발 3일 만에 수도서울을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다.

참전우방군 최초참전부대 미군 스미스보병대대가 오산에서 인민군 탱크부대진격저지에 나서 싸웠지만 역부족으로 대대원 거의 다가 전사했다.
국군은 밀리고 또 밀려서 낙동강전선에서 조국사수를 결행하고 인민군과 대치, 치열한 전투는 연일 계속됐다. 피아간의 전사자 시체가 낙동강 물을 붉게 물들여 흘러갔다고 한다. 맥아더장군이 인민군의 허를 찔러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해 인민군은 산을 타고 북한으로 패주했다. 1950년 9월28일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서울을 탈환해 중앙청에 태극기를 계양했다.

북진한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진군했다. 예상치 못한 모택동 중공군이 참전해 국군과 미군이 중공군의 피리소리 꽹과리 소리 속에 포위돼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고 부득이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피난열차 지붕위에 피난민이 인산인해이고 졸다가 떨어져 죽는 사람, 터널에 받혀 떨어져 죽는 사람 등 많은 사상자를 냈다. 공산당들은 구덩이를 파놓고 반동분자라고 매달아 바다 속에 수장하고 우물 속에 사람을 처넣어 잔인하게 살상을 자행했다.

전쟁은 엄청난 희생과 재난을 야기했다. 우리 부모님은 6.25전쟁때의 참상을 모르는 자손들에게 참담하고 기막혔던 한 많은 6.25전쟁을 알려주고 국가관의 확립과 충효사상을 고취하고 국토방위의 소임을 다하도록 지도 육성해야 하겠다.

‘조국이 있어 우리가 있고 우리가 있어 조국이 있다’ 부모가 계셔서 우리가 있고 자손들은 자라서 조국을 수호하고 발전번영의 길로 나아간다.
2010년 한국전쟁 6.25동란 반발 60주년을 맞아 북괴도발 가능성에 대비하고 국방의 안전을 준수하며 국력을 집결해 국민각자 맡은바 소임에 최선을 다해 피흘려 조국을 수호하신 영혼을 위로하고 전선에서 부상당한 많은 역전의 용사들에게 감사하자.
‘우리의 소원은 남북통일’ 남북한 동포가 염원하는 조국통일이 성취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