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선5기 1년, 포용과 관용이 관건
민선5기 1년, 포용과 관용이 관건
  • 방용식 기자
  • 승인 2011.05.26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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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

1776년 3월. 사도세자의 아들 ‘산(훗날 정조)’이 왕위에 올랐다. 즉위식을 마친 임금은 영조의 시신을 모신 빈전(殯殿) 밖으로 대신을 불러 모았다. “오호라!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노론(老論)은 경악했다. 노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등극했을 때 멸문(滅門)의 화가 자신들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 세자였던 ‘산’의 등극을 방해한 데다 죽이려고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금이 된 ‘산’은 아비를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인 노론을 정치보복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외할아버지격인 홍인한(혜경궁 홍씨의 작은 아버지)과 정후겸(화완옹주의 양아들) 등 일부를 죽이는데 그쳤다. 재위기간 중 그는 정치적 실각세력이던 남인을 발탁했고, 얼자(孼子)를 학문에 따라 등용했다. 수원 화성을 만들면서 역부(役夫)들에게 임금을 줬고, 노비의 고용노동제를 생각하기도 했다.

정조보다 약 360년 전 태종의 3남 ‘도(훗날 세종)’ 역시 입장은 비슷했다. 왕위에 오르기 전 아버지인 태종이 ‘도’의 장인이던 심온과 그의 동생인 정을 역모의 혐의로 죽였다. 심정은 명나라로 사신을 갔던 심온과 대질시켜 달라고 했지만 박은, 유정현이 그럴 필요도 없다며 죽일 것을 태종에게 극력 주장했고, 결국 심온과 심정은 사형을 당했다.

왕이 된 ‘도’는 이미 죽은 박은을 그대로 뒀을 뿐 아니라 살아 있던 유정현에게는 재위 8년까지 정승의 자리에 남겼다. 형인 양녕대군을 옹호했던 황희는 18년이나 영의정으로 썼다. 게다가 노비였던 장영실은 종3품 대호군(大護軍)으로, 바닷가 출신이 낮은 윤득홍은 ‘선박을 잘 알았다’며 병선과 조운을 맡아보게 하며 정2품 중추원사로, 송미희는 ‘활을 잘 쐈다’면서 변방을 지키게 했고 종2품 가정대부로, 노비출신 박자청은 ‘축성(築城)’의 공로로 정2품 의정부참찬으로 임용했다.

하지만 과문한 탓인지 우리나라 자치단체에서 이런 모습을 보거나 들은 적이 없다. 지난해 6·2 지방선거로 집권한 시장·군수·구청장들은 혹은 같은 고향입네, 혹은 같은 학교출신입네 등 이유를 대며 주요 보직을 맡겼다. 대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은 한직으로 전보했거나 전출시켰다.

이제 곧 소통을 내세운 민선5기가 1년을 맞는다. 결국 성공한 리더십은 관용과 포용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