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지 못한 다섯 번째 편지
보내지 못한 다섯 번째 편지
  • 시정일보
  • 승인 2005.01.13 14:13
  • 댓글 0

▲ 김성옥씨

보고 싶은 올케에게:
올케,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 싶고 알고 싶소. 물론 이미 리혼장을 놓고 나간 즉 한집 식구가 아니고 남이 되였다는 올케를 외운다면 나부터도 믿어지지 않겠지만.
나는 아직도 9년전 올케가 휠체어에 타시는 시아버지 앞에서 《아버님, 어머님, 제가 영이아빠(남동생이 먼저 한국에 갔음)와 같이 한국에서 5년만 벌면 우리도 잘 살수 있어요. 믿어주세요.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부디 건강하시고 그간 애들 볼보시느라 수고 많으시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소학교(초등학교) 4학년, 1학년짜리 어린 두 딸애를 끌어안고 울다가 한국으로 떠나던 그 시각을 잊을수가 없구만.
출국해 5년이면 돌아와서 남부럽지 않게 살겠다며 한국 가서 제 남편과 같이 살림하며 돈도 그렇게 잘 벌던 올케가 한국 가서 5년만에 리혼했다는 청천벽력이 들려올줄은 누가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소! 부부가 갈라져 있으면 갈라져 있어서 그렇다손 치고 이건 한국에 도착한 그날부터 둘이 한집에서 오순도순 재미있게 살다가 난데없이 리혼이란 웬 말이요?! 다른 사람은 다 리혼을 해도 내 동생네만은 절대 리혼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 믿음과 판단이 이렇게 무자비하게 하루 아침에 박산날줄 몰랐소.
인자하고 입이 무거우신 칠십고령의 시어머님이(1991년 첫 번에 갈 때부터) 애들을 키우느라 고생하신 것이 가슴 벅차지 않소? 말 잘 듣고 키가 1.60 메터 이상으로 훤칠하게 자란 딸애들한테 미안하지 않소? 또 남편이 올케에게 돈을 벌어다 주지 않나, 아니면 남의 여자를 보고 다니는가! 모든 것이 다 아닌데 올케는 왜 이런 길을 꼭 걸어야만 했소? 속 시원히 올케의 합당한 리유라도 들어보았으면 덜 안타깝고 리해나 되겠는데. 세상에 믿기 어려운 것이 인간이라더니.
처음 이 소식을 듣고 남편이 한국 갈 때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나는 며칠동안 혼자서 눈물로 시간을 보냈소. 그러면서도 한쪽으로는 혹시나 행여나 하며 올케가 《나는 어찌어찌하여 갑니다.》라는 전화라도 걸려올 줄 알았는데 오늘까지 감감 무소식이니 세상이 무정한지 돈이 무정한지?
나는 내 나름대로 직성이나 풀어보려고 이렇게 보낼 곳 없는 편지를 다섯통째 쓰는구만. 이 다섯통의 편지를 쓰며 내가 흘린 눈물 얼마인지 올케는 알수 없겠지. 아직도 내 눈앞엔 중국에 있을 때의 올케의 형상이 선연한데 벌써 9년이나 흘렀구려. 올케가 시집을 올 때의 우리 집은 아버지께서 문화대혁명때 받은 피해로 두 다리를 쓰지 못하고 휠체어에 앉아 다니신지 15년이 되는 해였다. 그때 로동력이 강하고 돈이 있는 집들은 모두가 벽돌집을 지어도 우리 집은 여전히 헐망한 기와집에서 구차하게 살았다. 그래도 한마을에서 동생의 됨됨이를 잘 아는 올케는 이를 나무람하지 않고 선뜻이 결혼식을 올리고는 돼지와 닭을 키우기 시작했다.
약빠르고 알뜰한 올케는 그때 남편이 교편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남자일, 여자일을 가리지 않고 매일을 그렇게 바삐 보내면서도 언제 한번 불평의 말 한마디 없이 무엇이든 자기가 응당 해야 할 일로 간주하고 처사하여 아버지와 어머니는 앉으나 서나 며느리 자랑이였다. 혼자의 힘으로 돼지 10 여마리에 닭까지 300 여마리를 키우면서 한푼이라도 돈을 더 받자고 동생과 상론하여 당나귀 한 마리를 사서 며칠에 한번씩 아침엔 닭알을 싣고 30여리 떨어진 목단강 시내에 갖다 팔고 돌아올 땐 식당의 돼지 뜨물을 받아 왔었다. 나먹은 아줌마도 아니고 갓 시집을 온 조선족 색시가 당나귀를 몰고 시내로 다니는 것은 말이 쉽지 정말 여간치 않았다.
한번은 한족동네를 지나오다가 조선 아줌마가 당나귀차에 앉으니 우습다고 애들이 놀려주려고 지껄였는데 그만 당나귀가 놀라 후닥닥 뛰는 바람에 그 더러운 돼지먹이 통이 뒤번져 지면서 올케는 뜨물 투성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