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 빠른 베트남의 자본주의 실험
속도 빠른 베트남의 자본주의 실험
  • 시정일보
  • 승인 2005.03.17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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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 남 성동구의회 의장
성동구의회는 지난 3월4일부터 10일까지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다녀왔다. 이번 연수와 관련, 일부에서는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을 가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풍부한 의정경험 축적과 21세기 다양성의 시대에서 여러 문화를 습득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강했다. 6박7일간의 연수에서 우리는 사회주의라는 이질적인 체제에서 느끼는 색다름과 문화의 신선한 충격을 체험했고, 지역주민을 위한 폭넓은 의정활동에 활력소가 됐다.

민족자존심 강한 베트남


우리가 찾은 베트남은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속에 자본주의를 실험하려는 그들에게 있어 미래는 밝아 보였다. 시장경제를 계획경제에 접목하는 그들은, 우리가 과거 개발시대 끝없이 추진했던 국가발전을 실험하는 듯 했다. 하노이市 인민위원회 방문 때 우리를 환대해 줬던 Mr. Levan Hoat 상임위원장의 “베트남은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해 국가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있고, 한국과 베트남이 경제 사회 정치 등 모든 면에서 더 긴밀한 관계를 갖기 기대한다”는 말에서도 ‘부국(富國)’을 향한 베트남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베트남의 경우 한국인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건 다름 아닌 우리나라 기업들, 특히 베트남에서 하노이호텔 등을 경영하며 경제발전의 기틀을 놓는데 일조하고 있는 대우와 같은 기업들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이 결과 베트남은 대한민국을 아시아지역의 중심 국가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경험을 배우고 싶어 했다. 모 은행의 CF-자전거가 사라지고 오토바이가 늘고 있다는 카피-에서 우리는 10년 후 베트남을 짐작할 수 있다.
베트남이 이렇듯 빠른 경제발전을 이루는 데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라는 것 외에도 그들의 남다른 민족자존심에서 연유한다. 베트남은 주지하다시피 미국과 프랑스라는 ‘절대강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였고, 결국 승리했다. 1945년 9월 프랑스 식민지로부터의 독립선언을 시작으로 촉발된 베트남 전쟁은 1945년부터 1956년, 1956년부터 1972년, 1972년부터 1975년까지로 구분된다. 30년에 걸친 전쟁 속에서도 그들은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을 이루어냈다. 이는 베트남인의 굴복 않는 민족자존심의 결과였다. 이런 자부심으로 베트남은 현재 개방물결 속에서 사회주의에 자본주의를 수용하고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예사롭지 않은 국가와 국민들이었다.
그러나 베트남에게도 위기는 있다. 바로 사회주의라는 체제가 가진 한계와 체제특성상 나타나곤 하는 독점적 지배이다. 빠른 발전에도, 이런 과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베트남은 지배집단의 부패와 개인의 창의성을 덜 고려하는 사회주의 속성으로 더 이상의 발전을 기약할 수 없으리라 생각된다. 그들이 비록 일정 한도의 빠른 경제성장을 할 수 있더라도 사회집단간 위화감과 불안정한 상태가 유지될 게 자명(自明)하다. 사회주의는 유한계급론(The Theory of Leisure Class)으로 유명한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B. Veblen)이 일찍이 간파했던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라는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불가사의와 광기, 캄보디아


다음으로 찾은 캄보디아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나라였다. 1970년대 중반 인도차이나반도에 사회주의가 급속하게 퍼질 무렵 친미적 론롤정권을 무너뜨린 폴포트정권은, 집단광기(集團狂氣)에 사로잡혀 정권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국민 200만 명을 학살했다. 당시 캄보디아 인구는 800만이었다.
하지만 ‘앙코르와트’를 방문한 우리는 집단광기를 곧 잊었고, 그 어떤 지식과 이성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문화유산 앞에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앙코르와트는 당시 앙코르왕국을 지배하던 자야바르만 7세가 38년 동안 건설했다고 한다.
현대과학과 기술로도 100년은 걸린다는 앙코르와트. 그러나 이 찬란한 기념비는 ‘번영에서 망국’으로 가는 지름길이 됐다. 중국을 처음 통일한 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고 패주(敗主)가 됐듯이. 함포고복(含哺鼓腹)은 아니라도 가렴주구(苛斂誅求)만 않는다면 수성(守成)은 할 텐데 말이다.
국민을 이롭게 못하는, 그리고 국민이 저버린 정권은 그 명운(命運)을 보장할 수 없다는 진리를 앙코르와트에서 우리는 분명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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