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부드러움이 채찍을 이기는 사회
특별기고/부드러움이 채찍을 이기는 사회
  • 시정일보
  • 승인 2014.10.02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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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일 시인

[시정일보]임종을 앞둔 스승이 제자를 불러, 자신의 입을 보여준다.
“내 입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혀가 보입니다.”
“이는 보이느냐.”
“스승님의 치아는 다 빠지고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는 다 빠지고 없는데 혀는 남아 있는 이유를 아느냐?”
“이는 단단하기 때문에 빠져 버리고, 혀는 부드러운 덕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그것이 세상사는 지혜의 전부니라. 이제 너에게 더 이상 내게 줄 가르침이 없구나.”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요즘 돌아가는 사회의 현상을 보면서 노자의 <도덕경>이 마음에 와 닿는다. 우리교육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강한 사람만이 살아남는다고 줄곧 배워 왔다. 그래서 일까? ‘강자 존'이라는 말은 시민정신이 되어 버렸다. 이 같은 교육의 결과는 우리 사회를 반목과 대립으로 만드는 큰 걸림돌이 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5개월 전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이나 쌀 개방 문제를 접근하는 태도를 보더라도 그렇다. 주장하는 자가 정해놓은 답안지를 상대가 답으로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틀린 것으로 단정한다. 곧 바로 타도의 대상이 되거나 반목의 대상이 되어 단체행동으로 나선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쏠림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쏠림현상’이란 하나의 사항에 옳고 그름보다는 다수의 사람이 목소리를 높이며 하나의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을 말한다.

‘쏠림현상’은 한국에서 개최된 월드컵 응원이 절정을 이루면서 한국 사회의 쏠림현상은 토네이도현상처럼 무섭게 빠져들었다. 최근에 영화 <명량>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 예다. 관객동원이 순식간에 1000만이 넘는 것도 쏠림현상의 대표적인 케이스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라기 보다는 상대가 보고서 이야기 하는데 네가 뒤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초조해 진다. 물론 정치권 부제라는 특수상황도 한몫을 한다. 이순신 장군 같은 지도자를 그리워한다. 일종의 ‘안철수 현상’ 같은 경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정치꾼들은 이러한 국민성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정부를 향해 주장할 일이 생기면 국민들은 수직적인 주장만 일삼는다. 그런 가운데 종편방송은 쏠림현상의 주역이다. 펙트가 아닌 가정 론이나, 출연자의 개인적 예단만을 주장하는 쏠림의 방송이 되고 있다. 시청자들은 싸움구경마냥 감각적으로 흥미롭다. 언제부터인가 종편은 쏠림 현상의 선생이 됐다.

쏠림현상은 허구가 될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군중이 테러로 변모될 수도 있다. 요즘 광화문 근처에 나가면 동 시간대에 최소한 다섯 개 정도의 각기 다른 시위현장을 볼 수 있다. 시위는 초법적이다. 옳고 그름 보다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 일단 주장하고 보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한국은 달라져야한다고 말한다.

부드러운 주장을 하고, 부드러운 주장이 관철되는 따뜻한 소통 법을 말한다. 종편 방송도 펙트를 보도하는 방송으로 변하길 원한다. 교육은 초등학교에서부터 강자 존이 아닌 부드러운 주장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모습이 필요하다. 강한 태풍이 불어왔을 때 참나무는 뿌리째 뽑히거나 부러지지만, 갈대는 휘어질 지언정 부러지지 않고 오염물질을 걸러 내고 제 몫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요즘 사회를 인문학의 계절이라고 말한다. 인문학은 불확실한 시대를 소통으로 풀어보자는 내용도 들어 있다. 사랑은 소통이다. 사랑은 부드러움으로 다가 갈 때 늘 승리한다. 목적을 이루는 것이 수단이 아니라 과정도 아름다운 사회가 되어야한다. 지난 여름 무더위에 다녀간 교황은 부드러움이 많은 사람에게 지지를 받는 모습을 보여준 좋은 본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