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칼럼> 합창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
<시정칼럼> 합창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
  • 시정일보
  • 승인 2015.01.01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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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식 논설위원

[시정칼럼]영화 ‘카사블랑카(Casablanca, 1942)’를 기억하는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점령된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를 무대로 독일 군에 저항하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활약상을 그린 로맨스 영화다.

사람들은 보통 이 영화의 극적인 감동은 주인공 험프리 보가트가 자유 지역으로 사랑하는 애인 잉그리트 버그만을 안개 속으로 떠나 보내는… 라스트 신을 이야기하지만 그보다 더한 영화의 압권은 독일 군가대 프랑스 국가의 합창대결(?) 장면일 것이다.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시던 독일 군인들, 그들의 승전보를 우렁찬 군가로 기세를 올리자 이를 역겹게 여긴 한 호스티스가 감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프랑스 국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 돌연한 사태에 독일 군인들은 잠시 당황하나, 더 큰 목소리로 그들의 군가를 부른다. 한 가냘픈 여인의 독창을 합창의 힘으로 제압하려는 것이었다. 이 사태를 보고 있던 클럽의 주인은 피아니스트에게 연주하도록 지시하고 호스티스와 함께 프랑스 국가를 부른다.

그러자 여기저기 프랑스인 손님들도 하나 둘 이에 가세하여 국가를 합창한다. 결국 프랑스 국가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독일 군인의 군가를 삼키고 거리로 파도쳐 나간다.

합창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애써 ‘카사블랑카’라는 영화로 예를 든 것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동기와 조건은 통일감 또는 일체감의 조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결을 호소하는 몇 편의 논문보다는 심장에 어필하는 감동적인 합창 한곡이 한결 더 공동체 의식을 이룩할 수 있기에 그러하다. 인류가 갖고 있는 공통된 커뮤니케이션 가운데 하나는 미소이고 음악은 세계인의 공통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음악이야말로 인류의 심성에 깊은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이 우리 사회는 물론 미국과 러시아에서, 파리의 상젤리제나 아프리카의 밀림에서 또한 로마 교황청에서나 인도의 사원에서도 동일하게 사랑받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감동적인 합창이야말로 인간을 일체화시키고, 공동체 의식으로 유도하며, 그리고 공유물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하는 조성제라고 믿는다. 합창이 있는 곳에 일체감과 공동체 의식이 존재하고 우리가 하나라는 공존의식이 당위성처럼 따른다.

그래서 합창이야말로 위대한 힘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감동적인 합창이 없다. 아니 감동적인 것까지는 못되더라도 보편적으로 불릴 합창마저 없다. 왜 우리에게는 감동적인 합창이 없는가.

우리 사회에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음악인이 많은 편이다. 지휘자 정명훈,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 첼리스트 장한나, 소프라노 가수 홍혜경, 조수미, 신영옥. 세계적인 연주자와 교향악단은 이제 우리의 자랑거리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랑스럽게 감동적인 합창을 부를 수 있다. 하나가 되는, 즐겁고 행복한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범국민적 합창을 통해 국민적 통합을 이룰 수 있다.

1970년대 농어촌 계몽의 신화를 만든 ‘새마을 운동의 노래’라도 좋다. 그 합창은 거국적인 식전에서도 어울리고, 성공한 친구의 축하연에서도, 포장마차의 소주잔 위에서도 어울리는 쉽고 밝으며 진취적인 기상과 조국애를 감동적으로 읽는 그런 민족의 찬가여야 한다. 그런 합창이 있으면 우리는 애써 거창하게 호소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단결을 외치고 질서를 부르짖지 않아도 될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정치적으로 혼탁한 사회, 상호 불신 그리고 갈등과 혼란을 더 이상 원치 않는다. 총체적 결집을 위해 그 무엇에 앞서 감동적인 대 합창곡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한남대 사회복지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