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텅 빈 존재가 아니야”
“너는 텅 빈 존재가 아니야”
  • 시정일보
  • 승인 2015.04.09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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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쓰쿠루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김재훈 (용산구청 자치행정과)-
   
 

[시정일보]“모든 소설의 결말은 되찾은 시간이다.” - 르네 지라르

<순례를 떠난 해>의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이름 그대로 ‘형태를 만드는', 역사 설계 엔지니어다. 서른여섯의 어엿한 성인이지만, 청소년 시절 ‘완벽한 공동체'라고 여겼던 네 친구들로부터 절교당한 뒤 언제나 공허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쓰쿠루는 새로운 연인 기모토 사라의 도움으로 무려 16년이 지나서야 옛 친구들을 찾게 된다. 그리고 드러나는 사건의 전말. 겨우 이거였어? 라고 말하긴 그렇지만, 마치 농담처럼, 쓰쿠르는 잃어버린 시간과 화해한다.

“너는 텅 빈 존재가 아냐.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넌,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다른 모두의 마음을 안정시켜 줬어” - 아오

ㅡ“하지만 말이야, 옛날에는 나한테도 멋진 친구가 몇 명 있었어. 너도 그 가운데 하나였지.” - 아카

“넌 정말 멋지고 색채가 넘치는 다자키 쓰쿠루야. 너에게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어. 자신감과 용기를 가져" - 구로

비록 비극적 사건으로 인해 시로의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지만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남은 친구들과의 만남으로 인해 그는 더이상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게 되었다. 친구들의 응원은 그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힘이 되었다. 말하자면 ‘이름'과 ‘색채'라는 기호를 통해 공동체, 혹은 타인과의 조화(또는 부조화)를 이야기하는 게 작품의 전체적인 맥락일테다. 아마 작가는 동양의 음양오행(오방색)이나, 서양의 연금술(제5원소), 혹은 화학(쓰쿠루는 친구들과의 공동체를‘케미스트리'에 비유한다.)에서 캐릭터 모티브를 따온 듯 싶다.

일종의 상징으로서, ‘시로가 곧 사라고 사라가 곧 시로'라는 건 하루키의 애독자라면 대충 눈치를 챘을테다. 시로는 쓰쿠루에게 있어 ‘억압된 소망'의 대상이었다. 쓰쿠루는 시로를 범하는 꿈을 종종 꾸곤 하는데(구로도 함께 등장하지만 사정은 언제나 시로에게 한다), 이러한 꿈은 곧 -프로이트식으로 말해- ‘억압되고 배척된 소망의 위장된 충족'이니 말이다. 한편 사라는 ‘억압되지 않은' 욕망의 대상이다. 이미 쓰쿠루는 죽음을 직면하는 통과의례(이니시에이션)를 치루었고, 더이상 자신의 욕망을 억압할 필요가 없다.

작품의 열린 결말은 두가지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 방향은, 새드엔딩이다. 사라는 떠나고 쓰쿠루는 또다시 혼자 남겨진 채 죽음과 같은 고독을 대면한다. 사라에게는 - 하이다와 마찬가지로 - 그의 젊은 연인과 헤어질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샤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스스로 행위를 결정하지 못하는 사물들(‘존재')과는 달리 미리 주어진 본질이 없으며(‘무'), 그래서 스스로의 본질을 만들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실존주의자 쓰쿠루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때문에 사라가 떠나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욕망의 완전한 충족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라캉)

다른 한가지 방향은, 해피엔딩이다. 사라는 늙은 애인(?)과 헤어지고 쓰쿠루에게 돌아온다. 이를 통해 쓰쿠루는 비로소 진정한 ‘욕망의 주체'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삶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만들기 위해,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적극적으로 행동한 덕분이다. 그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시로=사라를 욕망해 왔다. 무의식이란 단지 마음속에 억압된 부분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심적 현상의 기층으로서, ‘각성의 근원지'라고 볼 수 있다. 무의식은 고차원적 지성으로서 전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만을 갖고 있다. (나카자와 신이치)

얼마전부터 듣기 시작한 ‘이동진의 빨간 책방(빨책)' 제40화에서, <순례를 떠난 해>를 보면 하루키의 실존적인 면과 당위적인 면이 괴리를 일으킨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아마 과거의 (실존적인) 하루키라면 전자의 결말을 택했으리라. 하지만 최근의 하루키라면 왠지 후자 또한 가능할 것 같다. 하루키 작품 속 ‘나'는 성장해 왔고, 또 앞으로도 성장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