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경학사'
기고/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경학사'
  • 김기록 / 사) 노인의 전화 운영위원
  • 승인 2022.06.20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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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록 / 사) 노인의 전화 운영위원
김기록
김기록

[시정일보] 광복절 77주년이 다가온다. 해마다 광복절 기념식은 거창하게 치루는 뜻 하지만 쌓여가는 세월만큼이나 단순 반복되는 형식적 행사에 그치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요즘 유행하는 인문학 관점에서도 광복절과 독립운동사, 현장답사 등은 공부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각종 언론매체는 물론 특히 지자체에서는 빈번하게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여 강의하고 유적지를 탐방하고 있으니 바람직하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삶, 思考 또는 인간다움 등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학문이 바로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우리가 만나보지 못한 사람, 가보지 못한 장소,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삶에 대해 생각해 왔는지를 보여주면서 인문학은 우리가 자기 삶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연관시킴으로써 그들은 우리의 전통이나 역사에 무엇이 올바른지를 답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학문은 우리가 가족, 지역사회, 그리고 국가에서 마주하는 문제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무엇이 되었건, 인문학적 방법의 내용을 채택하여 인문학이 우리의 다양한 유산, 전통, 역사를 반영하고, 국민 생활의 현재 조건에 부합하는 것인가에 집중하여 환경에 관한 연구와 응용을 하는 것이 핵심이다.

사실 결론은 인문학은 우리가 개인과 사회로서 인간의 경험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 핵심이며,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올해의 광복절은 좀 더 의미 있게 살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며
수많은 독립 영웅들의 헌신을 깊이 생각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광복절은 1945년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날이다. 경축의 날이지만 일제강점기 35년과 그에 맞선 독립운동의 역사가 자연스레 떠올라 축(祝)과 비(悲) 양 감정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돈다. 1910년대 초, 국권을 강탈당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를 상기한다.

왜정 치하에 일제는 헌병을 앞세운 강압적이며 비인도적인 무단 통치를 강행했으며, 모든 정치·언론·집회의 자유를 박탈했고, 친일파를 길러내 우리 민족을 이간·분열시켰다. 그뿐만이 아니라 토지 및 각종 광물 자원의 경제적 수탈과 우리말 사용 금지, 신사참배 강요, 성씨 개명 등 민족말살정책까지 펼쳤다.

이러한 수많은 탄압 속에서도 독립운동은 꾸준히 이어졌다. 국내에서는 비밀조직의 형태로 군자금 지원에 힘썼고, 국외로는 만주 등지에서 수많은 독립군 부대들이 광복이 오는 그날까지 목숨을 내건 무장투쟁에 앞장섰다. 여기에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오호라. 애통하다 우리 민족이여 사랑스러운 한국 이여 땅이 없으니 무얼 먹으며 나라가 없으니 어찌 살 리요 내 몸이 죽으면 어느 산에 묻히며 아이들이 자라면 어느 집에 살 것인가 애굽의 백성들을 보지 못했는가? 입 안에 든 음식을 짜낸다 해도 빚을 갚기 부족했다. 월남의 역사를 읽지 못했는가? 머리 위의 하늘을 팔더라도 삶을 이어가지 못했다. 나는 모른다고 말하지 말라. 내 나라 재산을 내가 잊고 있는데 저들이 어찌 빼앗지 않으리오.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의 천직을 내가 포기하는데 저들이 어찌 엿보지 않으랴”

차라리 칼을 물어 자결하는 건 내 몸을 죽여 오히려 적을 통쾌하게 할 수 있고 곡기를 끊어 굶어 죽는다 한들 나라를 팔고 이름을 파는 것 같아 참을 수 없다. 장차 눈물을 흘려 하늘에 사무치는 치욕을 받으려는가 그러느니 힘을 길러 종국의 결과를 봐야 한다. 만사를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어도 다시 한번 백절불굴의 토지를 살려야 한다. “(경학사 전문 일부)

1910(융희 4)년 8월 29일 치욕의 한일합병 조약으로 국권을 잃게 된 이후 같은 해 12월 30일 이회영(李會榮)의 일가족(一家族)은 만주로 집단망명을 감행하는 결단을 내렸으니 과연 이항복(李恒福)의 후손들다운 결연한 행동이었다.

‘1855년 서울 출생, 8대에 걸쳐 정승을 배출한 명문가 자제, 30세가 되던 1885년 양부로부터 막대한 재산(1만여 석)을 상속받음, 과거 급제,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관직에서 물러남, 55세 되는 1910년 독립운동을 위해 60여 명의 일가권속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전 재산을 쏟아부으며 독립운동을 펼침, 1934년 상하이 빈민가에서 영양실조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이 기록은 ‘이시영’ 초대 부통령의 형제 ‘이석영’ 애국지사의 일생을 요약한 것이다.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수천억대에 이르는 재산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헌납하고 신흥무관학교 교장까지 역임하며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몸소 선보인 ‘이석영’ 애국지사! 2022년을 사는 우리가 19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와 같은 상황에 맞닥뜨렸다면 과연 그처럼 결단력 있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할 때면 마음 한편이 숙연해지면서, 그를 위시한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고귀한 희생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애국선열의 헌신 덕분으로 오늘날의 나와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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