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9 호주머니 속 그 도토리
공무원의창#9 호주머니 속 그 도토리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6.02 08:55
  • 댓글 0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우리 동네 화정동 꽃마을엔 작은 뒷산이 하나 있다. 사유지이지만, 주민들이 좋아하는 산책로이다 보니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축구장 2개만 한 조그만 야산이기는 하나, 콘크리트 빌딩에 둘러싸여 사는 주민들에게 소중한 곳이다. 군부대 시설로 사용하던 흔적이 남아 있고 철조망도 그대로다.

24년간 이 동네에서 살며 이 산이 계절을 타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기에 내게도 무척 소중한 숲이다. 먼 산은 못 가도 틈틈이 오르내려 작은 돌 바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다. 산 이름은 지렁산. 십 분이면 오를 수 있는 산 정상(?)엔 커다란 고인돌 모양의 바위도 있다.

산꽃과 열매가 풍성했던 어느 해는 실뱀도 몇 번 보았다. 아마도 산의 이름표는 이 파충류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어느 날 오래된 아파트 근린공원 목책에서 배춧잎을 삼시 세끼 먹은 듯한 도마뱀을 만난 적도 있다.

산자락에 우리 아파트가 들어서고 이후 고등학교가 세워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민방위 교육장이 생겼다. 산의 발가락이 하나둘 잘려 나가고 있었다. 대형 차량 정비시설이 들어선 후, 얼마 전에는 작은 새끼발가락마저 자른 터에 물류창고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들어섰다. 산의 입장에서 보면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야가 완전히 가려진 셈이다. 사계를 또렷하게 느낄 수 있는 진풍경마저 사라지지 않을까 내심 조바심이 인다.

이 산엔 참나무가 많고 다음으로 밤나무가 많이 자란다. 가을이면 산머리 부분에 풍성하게 열린 알밤이 지천이다. 씨알이 골프공만큼 자라면 사람들은 짙은 밤 향내에 끌려 떨어진 밤송이를 발로 까기에 여념이 없다. 산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의 쇳소리 호통에도 아랑곳없다. 나도 몇 번 그곳에서 스릴을 즐겼다. 비탈을 구르는 알밤과 막대기를 휘두르며 소리를 내지르는 산주(山主) 사이에서.

어느 해 늦가을 해가 식어 가던 무렵이었다. 청설모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낙엽을 뒤지다 나를 발견한 청설모의 눈은 다급해 보였다. 청설모가 부지런히 움직여도 수확은 기대할 것이 못 되어 보였다. 이미 사람들의 호주머니와 가방, 또 누군가의 자루 속으로 도토리는 죄다 수거된 후였기에. 이제는 정말 그만두어야 한다.

한때 배곯던 시절 우리에겐 소중했던 구황식물(救荒植物)이었지만, 지금이 어디 그런 시대인가.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고 어르신들도 이제 보신탕 대신 흑염소탕을 찾지 않던가. 도토리묵이 아니더라도 먹을 것이 넘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에겐 한때의 즐거움이겠지만, 다람쥐나 청설모, 갈까마귀, 딱따구리에겐 눈 쌓인 겨울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식량이다.

겨울에 시골길을 가다 보면 볏단을 모두 베어 낸 자리에 하얀 공룡알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젊은 친구들은 눈 쌓인 들판에 놓인 이 정체 모를 원형 물체를 ‘마시멜로’라고 통칭하나 보다. ‘볏짚말이’나 ‘곤포 사일리지’라고 불리는 이것은 추수를 끝낸 논의 벼를 알뜰히 수거해서 원형으로 말아 둔 것이다. 주로 소나 돼지 등의 사료로 판매된다.

문제는 이렇게 사일리지로 포장된 논엔 떨어진 이삭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논이 많을수록 철새들에겐 고달픈 여행이 된다. 파주와 천수만, 김포의 철새도래지의 지자체는 농민들에게 사일리지만큼의 돈을 주고 그냥 볏단을 뿌려 놓는다. 긴 거리를 날아오느라 기진한 철새들은 이런 논에서 배를 채운다.

혹자는 조류독감을 이유로 철새들에게 먹이 주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생태계 어느 종이든 개체 수가 치명적으로 줄어드는 것의 후과는 반드시 최상위 포식자인 인류에게 향하기 마련이다. 꿀벌이 사라지면, 세계 농작물의 70%가 사라진다는 말이 있듯. 그러니 그대여. 산에 가거들랑 주머니에 넣은 몇 알의 도토리마저 다 숲에 털어놓고 오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