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10 퇴임을 앞두고 K에게
공무원의창#10 퇴임을 앞두고 K에게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6.05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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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K군. 한 번쯤은 노포의 난롯가에 앉아 밤새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을 텐데. 떠날 때가 되니 아쉬움이 남네. 그런 거 잘 알잖나. 나이 들수록 젊은 사원에게 말을 조심하게 된다네. 혹여 내 말이 ‘라떼는 말야’식의 끝없는 회고담으로 들릴까 봐 그간 자네에게 긴말을 자제했네. 그래도 떠나는 마당에 자네에게만은 내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네.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자네를 볼 때마다 참 바르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 그리고 그 푸름이 세월에 변색하지 않고 자라서 많은 이들에게 그늘을 드리울 수 있는 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장강의 뒤 물결이 앞의 물결을 밀어낸다(長江後浪推前浪, 장강후랑추전랑)’고 하지. 이 말을 사람들은 세대교체의 뜻으로 사용하네만, 이치로 따지면 앞의 물이 길을 내어야 뒤의 물이 폭을 넓히며 흐르는 것이 아니겠나. 그리고 처음 물길을 내야 하는 앞 물의 운명은 보통 흙탕물일세. 대지에 흔적도 없이 스며들어 사라지기도 하고 토사와 합쳐져 뒹굴며 길을 냈던 이들일세.

그래서 그들의 삶엔 무언가 정리되지 않은 구닥다리의 흔적과 온몸으로 맨땅을 파며 흘렸던 투지도 함께 녹아 있네. 권투로 치면 한 방에 통쾌하게 상대를 쓰러드리는 쾌감은 없지만, 매회를 버텨 끝없이 맞으면서도 잽을 던져 끝내 9회 말에 상대의 다리를 풀리게 만드는…. 아마도 나와 내 선배들의 삶이 지구력과 근성으로 점철된 데에는 그런 연유가 있었을 것일세.

처음 조직에 들어올 때 난 총무처를 지원했네. 보기 좋게 낙방하고 서울특별시장의 옥새가 찍힌 임명장을 받았지. 그때 난 처음 알았네. 서울시가 지방이라는 것을. 원하지 않는 곳에 배정되니 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더군.

끝없이 흔들리는 마음에 난 다시 한국전기통신공사에 지원했지만 다시 낙방했네. 자네에게 재수의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젊은이에게 확정되지 않은 미래를 준비한다는 건 어떤 가능성이기도 하지만 한없는 불안감이기도 하네. 난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냈네.

1986년을 기점으로 서울시가 17개구에서 25개구로 분구되었지. 인력이 필요하니 승진 기회도 자연히 찾아왔네. 1989년, 내부 승진시험을 통해 난 서기가 되었네. 지금도 기억나네. 수험번호는 1200번대. 고르바초프의 서기는 아니었지만, 이왕 하는 것 제대로 하자고 다짐했네. 고르바초프에 ‘서기장’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사람은 젊은 시절 소련의 붕괴를 목도한 세대일세. 서기장이라는 말이 어색하다면 자네가 그저 젊다는 뜻이니 기뻐하게.

1999년 3월 15일은 내게 뜻깊은 날이네. 수송국민학교 자리, 1번지에서 근무하던 내가 마포로 적을 옮긴 날. 그때 멤버 중 두 분이 아직 조직에 있네. 2008년부터 2016년까지 내리 단속팀장을 했지. 4연속이었고 기간으로 따지면 8년 3개월이었네. 실업대책추진반에 배속받으니 혹자는 잉여 인력풀이라고 했지. 그때 반장이었던 사무관들이 문책성으로 내려오는 자리라는 인식이 강했다네.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지.

자네도 들어서 알겠지만 단속팀 업무는 매일이 전쟁이었다네. 무수히 펄럭이는 깃발 아래 갖은 욕설과 린치를 감당하며 한 점씩 나아가야 하는 일이지. 그 전쟁은 5년간 이어졌던 1차 세계대전보다 길어서, 나는 사무실에 앉아 영원히 끝나지 않는 서부전선의 참호전을 생각하곤 했네. 홍대·신촌권‧도화동 한전서부지점 앞이 바로 내 전장(戰場)이었네.

자정 넘어 불야성을 이루던 기업형 노점을 일제히 단속한 건 20년 만의 대집행이라고 하더군. 대규모 강제집행만 12회였으니 몸도 마음도 금방 타 버리더군. 난 늘 12월 31일의 해넘이를 보면서 ‘내년엔 나를 대신할 후임이 오는 기적’을 기도했다네. 3년간 직위 공모를 해도 누구도 단속 팀에 오려 하지 않았네. 기적처럼 응하는 인원이 왔지만 1년을 못 버티고 모두 줄행랑을 치더군. 직원 세계에서 단속팀장은 3D 업종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보직이었지.

‘어떻게 단속팀장 업무를 내리 8년 3개월이나 했냐?’면서 혹여 체질이라고 오해하는 이들도 있었네. 개미지옥에 갇힌 나방이 좋아서 그곳에 머무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나 또한 그랬네. 난 유폐되어 잊히던 사람이었네. 마치 망가진 전자제품을 폐기하는 것처럼 사람을 한번 분류하면 그 사람은 폐기된 물건 취급을 받았지. 순환되지 않는 조직의 생리를 보면서 난 중세의 계급제도를 떠올렸네. 한번 내몰리니 끝이라는 생각에.

그럼에도 남들은 7~9년 걸린다는 사무관 승진을 나는 만 12년 만에 했네. 입사 동기들이 모두 사무관이 될 때에도 난 여전히 거리에서 철거 진용을 가다듬는 일을 하고 있었지. 처음엔 마포의 ‘워스트’들은 죄다 단속반에 배치된다는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세월이 흐르며 확신하게 되었네. 이 조직에서 회자되는 말들은 대체로 사실에 부합한다는 것을.

긴 고통의 시간이었는데 난 그 고통의 실체가 무엇인지 나중에야 알았네. 그건 승벽심이나 고단함에 대한 불만 같은 것이 아닐세. 외로움이었네. 그 지독한 소외에서 오는 외로움 말일세.

‘난 영문 모를 어떤 이유 때문에 철저히 버려졌구나.’

현장엔 늘 칼바람이 몰아쳤지만, 내 마음속엔 언젠가부터 바람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네.

언젠가 요트로 ‘무동력 무기항 단독 세계일주’를 하는 사람의 다큐멘터리를 본 적 있네. 200여 일의 항해 중 가장 두려운 순간은 폭풍이 아니라 무풍(無風)이었다고. 무풍지대는 블랙홀과 같아서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지. 때로 이 무풍은 일주일 이상 지속되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무풍이라는 기후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무풍지대’라는 특정 지대에 갇힌 거라네. 그곳에서 바다는 깊은 침묵에 빠지지.

바다는 태양빛을 받는 거대한 반사경이 되어 낮 동안 주변을 눈이 멀 정도의 광휘로 삼켜 버리네. 온몸이 익을 것 같은 고통 속에 미동도 없는 적요함이 이어지면 미칠 것 같은 외로움에 사로잡힌다고 하네. 자신의 숨소리마저 삼켜 버리는 그 절대적 정체(停滯) 속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숨을 쉬거나 미친 듯이 노래를 불러 ‘소음’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네.

나는 나의 무풍지대에서 세월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책’에서 찾았네. 자네도 기회가 있다면 느껴 보게. 적막한 곳에서 책장을 넘기면 그 소리는 마치 파도 소리로 들린다네. 난 한 줄씩 읽어 한 쪽을 넘길 때마다 작은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네. 그리고 나는 기록에 몰두하였네. 2004년부터 틈틈이 습작했고, 생활의 작은 변화를 크게 받아들이기 위해 기록하고 생각했네.

일기(점점 일지로 변했지만)는 입사 이듬해인 1986년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이는 자신의 선택과 마음을 객관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네. 행정전산망이 들어온 때가 아마 1990년 중반이었을 걸세. 2006년에 한 번 하드가 깨지기는 하였지만 1986년부터 쓰기 시작한 업무 관련 빅 데이터는 차곡차곡 내 곳간에 적재되었지. 이곳엔 내가 겪었던 다양한 체험과 실무적인 판단, 그리고 법령정보와 대처 방안이 깨알같이 기록되어 있었기에 실무에서 길을 잃은 후배들에게 요긴한 지침서로 쓰이기도 했지.

작년 세밑 종합건강검진을 받았네. 검진 며칠 지나 우송된 결과는 매우 심각했네. 난 그러고도 눈앞의 업무를 처리하느라 서랍 속에 그 결과표를 방치했지. 42일이 지나서야 부랴부랴 신장내과, 소화기내과의 정밀 검진을 받았지. 조영제가 혈관을 타고 전신에 퍼지는 느낌은 마치 고춧가루에 몸이 절여지는 느낌이랄까. 너는 이번에 혼구멍이 나야 해, 그러는 것도 같았네. 원통의 CT 촬영기에 몸을 집어넣으면서 여러 생각이 들더군. 건강이 제일이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습관을 통해 건강을 유지하는 것에는 많은 노력이 따르는 법이라는 것을.

조직검사와 문진을 받고 다행히 더 살 수 있다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네. 술도 담배도 하지 않지만 스트레스가 소리 없이 몸을 갉아먹었던 것 같네. 세상일이 다 그렇지만, 사람과의 관계만큼 어려운 게 또 있겠나. “바다가 말라 바닥을 볼지언정, 사람은 죽어도 그 마음을 알 수 없다(海枯終見底 人死不知心).”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지.

부디 부탁하네. 자네도 얼마 안 가 인사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위에 올라갈 걸세.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정직하게 대우받는 조직, 잔머리 잘 굴리고 포장만 잘하는 사람은 금방 들통이 나서 도태되는 조직문화를 만들어 주게. 일보다는 뒷담화에 열중하고 없는 말도 지어서 유포하는 사람은 조직의 활력을 죽이고 사람의 삶을 망가뜨릴 수 있네. 부디 자네는 손님 같은 종업원이 아닌, 주인 같은 종업원이기를 기대하네. 공자님 왈(曰) “나무 심기에 가장 좋은 때는 20년 전이었다. 그다음 좋은 때는 바로 오늘이다.”라고 하지 않았나.

내 공직 생활 36년 중 25년을 야전에서 보냈네. 사무실의 책상이 서류와 법령의 터전이라면 야전은 구체적으로 살아 숨 쉬는 사람의 세계네. ‘사람의 세계’에서 요구하는 것은 지침과 법령을 외우고 있는 관료가 아닌, 손을 맞잡아 줄 사람이었네. 법령과 규정을 읊으며 집행하는 사람은 흔하지만, 현실적인 방책을 함께 고민하는 ‘사람의 온기’는 아무나 줄 수 없는 것이네.

불행히도 내 공직 생활의 8년여는 단속 업무였네. 때로는 행정적 물리력을 동원해야만 했지. 거친 욕설과 린치를 당할 때마다 나는 심지를 더욱 굳게 했다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법과 원칙이라는 대장간에서 더욱 단단해지는 사람이 되어 갔네. 송곳 하나 꽂을 데 없을 만치 깐깐한.

그건 자연인일 때 보았던 관료적인 공무원의 모습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네. 전장으로 출정하러 가던 어느 날 아침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본 후로 고뇌는 더욱 깊어졌다네. 그리고 난 규정과 현실 사이에서 끝없이 흔들리며 길을 모색하기로 했네. 그런 말이 있잖은가. 나침반이 끝없이 흔들리는 이유는 정북(正北)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기 때문이라는.

2004년 초급관리자가 되면서부터 법과 규정은 준수하되, 다른 해석이 필요함을 느꼈네.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말이네. 그마저 유리한 해석이 안 될 때는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내 마음을 그들에게 보여 주고자 했네. 물론 이 결심은 외부의 시민뿐 아니라 내부의 직원들에게도 적용되었네. 이런 과정을 거쳐 나는 관념이 아닌 실체를 존중하고, 이론이 아닌 해법을 사랑하게 되었네.

사람의 사유 방식이 바뀐다는 것은 곧 세계관의 변화요, 실천 방식의 차이를 만들어 내지. 그래서 감히 K군 자네에게 바라건대, 모두가 기피하는 사업장에 배치되어 업무를 하더라도 그것이 자네를 영적으로 더욱 풍부하고 강한 인간형으로 바꿀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하네. 위기는 곧 기회의 또 다른 이름표라는 것을.

진저리꼽재기(꼬장꼬장한 사람)의 말이 너무 길었다면 용서하게. 자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걸세. 부디 건강하시게. 영혼도 마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