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 인문학광장#13 예지몽(豫知夢)
시정 인문학광장#13 예지몽(豫知夢)
  • 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 승인 2023.06.20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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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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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 우리는 숱한 꿈을 꾼다. 그런데 예지몽을 꾸었다는 사람도 더러 있다. 말 그대로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는 꿈이다. 나도 예지몽을 꾼 친구 덕분에 대학교 1학년 때 참으로 희한한 경험을 했다. 진주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는데, 고3부터 서울 S대·K대·Y대를 겨냥한 ‘특별반’이 운영되었다. 정원이 문과·이과 합해 40명이고, 중간고사나 특별고사 성적에 따라 아래쪽은 드나들었다.

특별반이던 나는 부산대학교 전자과에 입학했고, 입학 동창 53명 중에 전자과만 다섯 명이나 되었다. 같은 신안동에 살면서 5·6학년 한 반에 특별반이던 C도 무역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모교 동창회가 없어서 우리가 발족하여, 토목과 친구 D를 회장 시키고 나는 총무를 맡았다. D는 고교 때 학생회 부회장이었다.

그러자, 무역과에 다니는 한 해 선배 A형이 모교에 가서 우리 대학교를 홍보할 계획을 세웠다. 고향이 산청인 A형도 고교 때 부회장을 지냈다. 그래서 A형과 같은 무역과인 C와 동창회장 D까지 세 명이 가기로 되었다. 셋이 모교에 들러 3학년의 참석 약속을 받았단다. 방학에도 학교에 나올 정도라 한 시간도 아까울 텐데, 흔쾌히 허락해줘서 감사했다.

그런데 C가 아무래도 세 명은 너무 적다며, 나보고 함께 가자고 했다. C의 집에서 500m쯤 오면 우리 집이고, 학교까지는 3.5km 거리다. 초등 때는 내가 반장이고 C는 분단장이었는데, 매일 아침 우리 집에 들러서 등교했고 하교 때도 함께했다. 중학교부터는 학급이 달라서 따로 등하교했는데, C가 학업성적에서 나를 능가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엿보였다.

어느 날 등굣길에 만나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영어 단어 중에 제일 긴 단어가 뭔지 아나?” “제일 긴 단어? 음... 그걸 내가 어찌 알아! 뭔데?” 나는 조금 무안해지며 되물었다. 친구가 자랑스럽게 알려준 제일 긴 단어는 스펠이 29자인 ‘floccinaucinihilipilification’(플락서노 서나이힐러 필러피케이션)으로, ‘뜬구름 같음, 무가치함’이란 뜻이었다.

모교에 가기로 한 7월 어느 날 아침, 집에 들른 C와 함께 늘 다니던 길을 잰걸음으로 걸었다. 고교 졸업 후 거의 5개월 만이다. “재영아, 내가 어젯밤에 억수로 이상한 꿈을 꿨다.” 친구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이상한 꿈? 뭔데? 아무개랑 데이트?” 나는 따라 웃으며, 좋아하는 여학생이 꿈에 나왔는지 물었다.

“그기 아이고, 네가 학교 강당에서 연설을 하는 거라.”

“오늘 연설은 D가 하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그런데, 니가 D 대신에 막 연설하더라. 웃기재?”

“꿈은 반대라니까, 맞네. 하하.”

그냥 웃어넘기고 모교에 관한 다른 얘기 나누며 부지런히 걸었다. 오랜만이고 한여름이라 그런지 전에 없이 등에 땀이 나고 숨이 찼다. 학교 강당에 3학년 400여 명이 모였고, 우리 네 명은 강단 뒤쪽에 나란히 앉았다. 하얀 교복 입고 빼곡히 들어찬 까까머리 후배들을 내려다보니 흐뭇했다.

그런데, 서울대 공대에 입학한 동기 두 명이 선생님과 함께 들어와서 입구 쪽에 자리했다. 재학 때 둘은 성적 1·2등을 다퉜는데, 원자력과에 간 K는 나랑 초등 동창이고, 섬유과 H는 같은 태권도 도장에서 함께 운동했던 친구라 반가웠다.

선생님이 간략한 안내 말씀에 이어 먼저 서울대생의 인사말 시간을 주었다. 둘이 서로 양보하다가 K가 먼저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H와 저는 선생님들께 안부 인사만 드리려고 왔는데, 마침 부산대학교 동문의 방문 계획이 있어, 이렇게 여러분을 직접 만나보게 되어 반갑습니다.”라며 꾸벅 절만 하고 후배들의 우렁찬 박수 속에 마이크를 넘겼는데, H도 비슷한 짧은 말만 하고 끝냈다.

이어서 A형이 연단에 나가 자기소개와 오늘 오게 된 배경을 잠시 설명했다. 참석한 3학년들이 1학년일 때 학생회 부회장이어서 아는 후배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뒤돌아보며 나와 C를 차례로 소개하고 오늘의 연사인 D를 연단 앞으로 불러냈다. D는 작년에 부회장이면서 눈에 띄게 워커를 신고 다녀서 따르는 후배가 많았다.

절을 하고 후배들의 박수를 받는 D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회장에 출마한 어느 친구의 러닝메이트 부회장 출마 권유를 수락할 걸 그랬나 싶다가, 도리질하며 피식 웃었다. 그 친구는 선거 결과 3등이라 대대장도 못 했다. 그런데, D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는 게 아닌가!

강당 안은 기침 소리 하나 없이 조용해지고, 잔뜩 기대에 찬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 “박수~!”라고 말하자, 후배들이 손뼉을 크게 치며 성원했다. D는 고교 2학년 때 선명 여상에서 열린 ‘영어 웅변대회’에서 1등 했던 친구라 나는 별로 걱정 안 했다. 그때 나는 2등 했고, 진주 공고 학생이 4등이었다.

그러나 침묵이 더 길어지자, A형이 급히 걸어 나가 D의 표정을 살피고는 자리로 들여보냈다. 갑자기 말문이 막힌 것이었다. “오랜만에 이렇게 후배들 앞에 서니, 저도 감개무량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심정을 이해하시고, 격려의 박수 보내주십시오.”라고 말하며, 몸을 돌려 나와 C를 번갈아 보고 빨리 한 명 나오라는 눈짓을 했다.

C가 팔꿈치로 나를 슬쩍 밀었고, 나는 얼떨결에 연단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D 대신 갑작스레 연단에 서게 된 나는 일단 호흡을 가다듬고 만나서 반갑다는 인사말부터 올렸다. 후배들 박수에 은근히 힘이 솟았고, 멀리 뒤쪽의 3학년 담임이었던 수학 선생님과 존경하는 영어 선생님 모습도 흘끔 바라볼 여유가 생겼다.

“1학년 때는 교양과정 학부라고 해서 전공 학과 구분 없이 50명 정도씩 반을 나눠 수업하고 영어, 수학, 철학 등등 배웁니다. 영어 시간에 지명을 받았는데, 제가 영어가 좀 되지 않습니까? 유창하게 읽고 깔끔하게 해석했지요. 우리 김홍안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라면서 능청을 떨고 딴 데를 훑어봤다. 하하하~ 후배들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랬더니 부여고, 경남여고, 동래여고 출신 세 명이 스터디그룹을 하자고 하데요. 마침 수학 잘하는 한석봉, 글 잘 쓰는 홍길동이 같은 반이라 매주 함께 만났지요. 처음에는 교내 콰이강의 다리 밑에 모여서 몇십 분 공부하고는 비스킷이나 먹고 놀았습니다. 나중에는 학교 근처 에덴공원부터 광안리, 해운대, 일광, 송정, 하단까지, 부산 시내 유원지 안 가본데 없이 놀러 다니느라고 이렇게 까맣게 탔습니다. 하하.” 하면서 낭만적인 대학 생활부터 꺼내 읊으며 관심을 끌었다.

금정산 기슭에 자리 잡은 넓은 캠퍼스의 수려함과 산성 막걸리 맛, 각종 서클과 5월의 학교 축제, 교내 박물관과 훌륭한 교수님 몇 분도 소개했다. 솔깃해하는 후배들의 표정과 간간이 나오는 박수 속에 그럭저럭 시간을 메우고, “여러분! 당연히 서울 등, 좋은 대학교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끝으로 한 가지만 말씀드리지요. 용 꼬리보다는 닭 머리가 되십시오!” 하면서 어쭙잖은 연설을 마쳤다. 그런데 반응이 예상 이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다음 해에 후배가 100명도 넘게 부산대에 들어왔다. 서울대 가려다가 내 연설 듣고 전자과에 왔다는 후배 B도 있다. B는 국방과학연구소(ADD)에 취직했고, 나중에 ADD에서 만난 적도 있다. 그리고 일찍이 재력가가 된 A형은 내가 개인 사업할 때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사람이 힘들게 살면서 어떨 때는 예지몽이라도 꿨으면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내일 벌어질 일도 모르고 살아서 오히려 더 드라마틱하고 즐거운 삶이 아닐까? 50년도 더 되는 긴 세월이 한줄기 유성처럼 흐른 지금 그날을 돌이켜보니, 인생은 정말 뜬구름같이 덧없고 허망하구나 싶어 괜히 서글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