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16 괴롭힘의 조직화
공무원의창#16 괴롭힘의 조직화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6.19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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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난 주말마다 축구를 즐기곤 했다. 1986년 10월 1일 국군의 날 공휴일. 그날도 인근 S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축구하다 결국 사달이 났다. 발을 딛고 뛰어올라 공중에서 볼을 차다 뒤로 넘어졌는데, 땅에 떨어질 때 오른쪽 장딴지를 깔고 눌러앉았다. 공과 한 몸이 되는 것이 모든 선수들의 로망이라지만, 공과 같은 탄성이 사람의 몸에 있을 리 없다. 우지끈하며 떨어진 순간, 눈앞에서 별이 반짝거렸다.

휴일이라 유야무야하다가 며칠 후 침 몇 대 맞은 게 고작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저런 작은 부상을 가볍게 여긴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통증이 심해질 때마다 한의원에서 찜질을 하거나 카이로 프랙틱으로 관절을 교정하는 등의 미봉책으로 때웠다.

그렇게 10년, 세월이 흐를수록 허리는 가라앉았고 디스크는 조금씩 내려앉았다. 더는 버틸 수 없어 1994년 9월 28일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에서 4, 5번 요추 추간판 탈출 제거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명의를 만나 28년째 지장 없이 살고 있다. 당시 진료부 원장으로 계셨던 주문배 의사 선생님의 덕이다.

수술 후 직장에 복귀했더니 바로 위 선배가 앙갚음을 했다. 1994년 김영삼 정부의 쓰레기 종량제가 시행되는데, 정책 시행 초기라서 규격별로 지정 판매소에 수십 킬로그램의 봉투를 갖다 줘야 하는 등 몸으로 뛰어야 하는 중노동을 시키는 게 아닌가? 당시는 서무주임이 결재권이 있어 동을 좌지우지할 때였다.

그 선배는 당시 도급경비・일상경비 등 정기 정산 보고 등을 하지 않아 본부의 여러 부서로부터 지탄을 받는 선배였다. 하지만 전직 인사주임으로 워낙 실세이다 보니 웬만한 직원이었으면 중징계를 받을 사안도 말로 때워 면피하는 재주가 있었다. 뒤에선 그를 모두 손가락질했지만, 그에게 직장이란 늘 그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개인 사무실과 같았기에 그는 별 가책을 느끼지 않은 듯했다.

그는 마치 중사가 신임 소대장을 대하듯 소위 ‘짬밥’으로 서열을 정리해 나갔다. 새마을지도자 출신의 세 살 위 별정직 동장님을 바로 그 7급 서무주임이 우습게 대했고, 근무 시간에 숙직실에서 전날의 과음을 풀고 있어도 그 누구도 건들지 못했다.

난 그의 직속 부하로 일반서무를 보았기에 그의 행실 세세한 곳까지 볼 수 있었다. 도무지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몇 차례 그에게 고언을 했고, 그때부터 그의 갑질이 시작되었다. 나를 자신이 직접 픽업했다던 그는 한 끗의 급수 차이의 괴력을 손수 보여 주었다. 왜들 하나같이 승진하고 나면 자신이 도와주었다고 생색인지….

7급과 8급. 이 한 끗발의 차이는 조직도표로 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현장에선 그게 아니다. 그와 같이 보낸 몇 개월의 시간은 다시는 되뇌고 싶지 않은 끔직한 생지옥이었다. 겉으로 봐서는 너무나 멀끔했던 그였기에 그를 잘 모르는 이들은 그의 어둡고 비린 속을 알 수 없었으리라.

“인류의 원죄는 사과를 훔친 것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죄와 타인의 고통에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철학자 아브라함 J. 헤셸의 말이다. 그리고 슬프게도 인간의 참혹함은 문명화되지 않은 밀림 지대가 아닌 엘리트로부터 위계조직화된 문명사회의 사각지대에서 더 많이 발생한다. 사람(권력)이 사람의 육신에 대한 통제권을 쥐게 된 어떤 특정 시점에서부터 사람이 일을 통해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방식은 시스템에 의해 보장받는다. 그래서 피해자가 느끼는 고통은 일상적이고 구체적이며, 결국 이 고통은 조직 전체로 보편화된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

학교폭력이나 군대폭력으로 고통받던 이가 훗날 가해자에게 그때 왜 그랬냐고 물으면 앵무새처럼 되돌아오는 답. 이런 대답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모를까, 대부분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은 대체로 사실에 가깝다. 가해자에게 일상이 된 사건은 너무나 소소해서 그에겐 기억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친위대 장교이자 홀로코스트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은 법정에서,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며 명령은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되풀이했다 하지 않던가. 바로 ‘악의 평범성’이다.

2003년 여름휴가 때 생긴 일이다. 설악산 휴양소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송천계곡을 등지고 44번 국도를 타고 한계령을 넘어 인제로 가는 길이었다. 마침 양동이로 들이붓듯 비가 퍼부었다. 3단 윈도브러시가 젖 먹던 힘을 써서 팔을 휘저어 보지만, 폭우는 하얀 장막을 드리웠고 안개까지 차량을 휘감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한계령 정상에서 인제 방향으로 내려가던 중 엔진이 떨리며 RPM이 급격히 떨어졌다. 계기판에 엔진체크 신호등이 켜지고 오르막에선 타이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인근의 주유소 공터에 차를 세워 긴급출동서비스를 신청했다. 얼마 후 나타난 견인트럭은 내 차를 견인해 출발했다. 우린 승용차에 앉은 채 견인되었다.

주유소 공터에서 차선으로 진입하던 순간, 내리막길을 내려오던 24톤 덤프트럭이 내 승용차를 들이받았다. 앞좌석엔 나와 아내가, 그리고 뒷자석엔 11살, 8살 딸들이 타고 있었다. 폭우로 시야가 거의 없었던 내리막길이었지만 덤프트럭은 마치 스켈레톤 트랙의 썰매처럼 질주해 우리 차의 옆구리를 집어삼켰다.

차량은 개구리밥처럼 떠밀려 도랑에 처박혔고 신차인 1,500㏄ 누비라Ⅱ 안의 우리는 청동기시대 화석처럼 굳어 버렸다. 유릿가루가 폭죽처럼 터졌고, 지금까지 들었던 그 어떤 소리보다 강렬한 아내의 쇳소리가 빗소리를 뚫었다. 견인차 내부의 조수석은 마치 벼락 맞은 대추나무와 같았다.

절벽 구간이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견인 기사와 일가족 사망이라는 기사가 당일 9시 뉴스에 나왔을 것이다. 원통의 무지개병원으로 이송되어 나와 식구들 모두 입원해야 했고, 다음 날에도 거동이 어려워 집 근처 고양시 자인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저녁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직속 상사에게 사고 경위를 설명하고 병가를 요청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그에게 전해들은 국장님의 호통.

“뼈가 부러져 움직일 수 없는 게 아니라면 당장 출근해야지! 이번 고과는 국물도 없어.”

인사 고과의 4종 세트는 실적, 능력, 성격, 적성 아닌가? 승진을 턱 앞에 두고 있던 나는 심연 속에서 녹아들고 있던 사지를 끌고 사무실로 기어들어 가야 했다. 치료를 중단했기에 불확정적인 예후만이 담긴 반 토막 난 진단서만 받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이해할 수 없었던 그의 처사. “그래, 가족 모두 교통사고를 당했다는데 어린애들은 괜찮냐?”라는 형식적인 위로의 말조차 듣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의 사연이 아무런 가치도 없구나. 일가족이 몰살당할 뻔한 사고를 겪고 아이들의 침상을 오가며 가슴 졸이는 아비의 사연 따위는…. 그저 한창 돈이 들어갈 나이의 아이 둘을 책임져야 할 후배의 처지를 이용해 마른 수건을 쥐어짠다는 생각만 들었다.

당시는 일 잘하는 것보다 특정 개인에게 충성심을 보이는 것이 더 중요했던 시절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참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선배들로부터 오랜 세월 이어진 못된 관행을 거부하는 건 차치하고라도, 눈치를 살피고 입안의 혀같이 움직이고 말하는 법을 그땐 알지 못했다.

아내는 그 일로 인해 일산의 종합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받아야 했다. 혈액종양내과에서 듣도 보도 못한, 암 환자에게나 놓는다는 마약 성분의 진통제 주사(Henoch-Schonlein Purpura)를 수차례 맞았다. 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퇴원한 아내는 이후에도 통원 치료를 계속해야만 했다.

그토록 아랫사람에게 차갑고 저열하게 굴었던 사람이었지만, 그는 승승장구했다. 퇴직 후에도 그는 회전의자에서 수년간 영화를 누렸다. 경조사에는 꼭꼭 기별을 하고 현직에 있을 때도 내 애사는 모르는 체하던, 예의 인심 좋게 동글동글하게 생긴 그 사람. 그는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고지식하고 아둔해 그렇게 눈치를 줘도 자신의 뜻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던 먹통?

사람 사는 데 어찌 괴롭힘과 갑질이 없을 수 있겠는가마는, 또 누군가는 피해를 보면서까지 이런 그릇된 관행에 맞서고 악습을 단절하기 위해 노력한다. 젊었을 때 선배들에게 당했다면서 “라떼는 그랬다”며 본전을 챙기려 아랫사람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이 있고, 낮은 직위에 있을 때나 높은 지위에 있을 때나 품위와 존중을 잃지 않기 위해 불합리한 관행과 싸우는 사람이 있다. ‘내가 당했으니 너도 당해 봐라’가 아니라, 내 대에 끝내야 한다. 다행히도 지금은 과거와 같은 악습은 많이 사라졌다.

생각해 보면 공직자의 지위와 권한이라는 것 모두 국민이 일시적으로 권한을 위임한 정부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이 권한의 행사에는 엄정한 규칙과 제약이 따른다. 나를 괴롭혔던 국장은 심성의 문제를 떠나 이 공적 권한을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남용한 것이다.

국장님, 부디 오래 사시라. 오래 살면서 남의 가슴에 박은 대못도 꺼내어 “내가 그때 왜 그랬지?” 한번 되씹어 보기를 원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뿐…. 죽을 때까지 늘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주는 기쁨도 누리시기를.

“Директор. Хорошо кушайте и наслаждайтесь в будущем. Привет Привет!”

(러시아어. “국장님 앞으로도 쭈욱 그렇게 잘 먹고 잘 사세요. 바이 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