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18 퇴직하니 매일 천국행이다
공무원의창#18 퇴직하니 매일 천국행이다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6.23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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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사기업에서 25개월, 그리고 계급사회에서 36년 10개월 10일을 살았다. 퇴직을 앞두고 결심한 것이 있다. 바로 출근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정해진 시간에 무조건 집을 나서기로 했다. 달라진 것은 행선지. 그리고 유급에서 무급으로, 수직에서 수평사회로의 합류.

퇴직 후 이레째 되는 2022년 7월 7일. 난 시간에 맞춰 어김없이 집을 나섰다. 사실 이 길을 퇴직 이후에 걷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빗물이 범람하여 둔치의 이마를 잠그는 상황이 아니고서는 1년 4개월을 한결같이 뚜벅이로 출퇴근했다. 불광천 상류에서 시작해 모데라토로 45분 걸어 직장에 도착하면 오전 7시 30분쯤 된다.

다만 이곳 도서관은 9시 정각에 문을 연다. 더 일찍 와도 소용없다. 변두리 단독주택 밀집 지역 내에 위치한 도서관이라서 그런지 청춘들이 별로 없다. 문을 열자마자 뛰어가 치열한 자리다툼을 할 필요가 없어 한결 마음이 놓인다. 오래전 서울 시내 시립도서관에 들어가면 나올 수도 없었다. 도서관 내를 벗어나면 자리를 내놔야 했기에.

도서관으로의 출근 복장은 늘 같다. 오른손에는 노트북, 왼손에는 물병과 휴대폰 그리고 잡다한 기기. 대림시장을 거쳐 속길 따라 싸목싸목, 서두르지 않아도 20분이면 족하다. 도서관에 나간 지 둘째 날 사물함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노트북을 이곳에 보관하진 않는다. 새 노트북이기도 하지만, 당분간은 내 스스로의 기강을 잡기 위해서라도 거치대까지 포함 4㎏은 되는 노트북과 가방을 들고 다니리라.

뜨거운 음료를 좋아하는 내게 보온병은 필수다. 연세가 좀 있으신 분들은 보온병을 마호병, 마호빙이라고도 한다. 일본어로 보온병을 가리키는 ‘魔法瓶(まほうびん)’에서 유래한 것이라는데, 뜻이야 당연히 따뜻함이 유지된다는 점에서 착안한 ‘마법병’. 요사이 흔히 말하는 텀블러도 이것의 일종이다.

어젯밤 비가 거칠게 쏟아지더니 아침은 좀 선선하다. 바람은 어떻게 머무는가? 바람은 늘 대상을 통해 자신을 시현(示現)한다. 도서관 정문 마당에서 올라간 깃대에 매달린 깃발을 보면 그의 존재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무형의 유형. 태극기를 중심으로 좌우에 새마을기와 구기가 바람의 희롱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바람의 샤워를 머리카락으로 쓸어 올려 바지랑대 위에서 가위바위보를 하며 펄럭거리는 모습이 제각각 싱싱하다.

어제 오늘 점심을 김밥천국에서 먹었다. 착한 김밥이 죽으면 가는 곳이 바로 ‘김밥천국’이라는 썰렁한 농담이 있었다. 메뉴판을 보면 맨 위에 ‘천국김밥’이라는 것이 있다. 값이 착해서 천국에 간 김밥이다. 2,500원. 대개 사내들의 선택지는 단순하다. 메뉴판을 대충 훑어보고는 “이모, 라면에 천국김밥이요.” 아니면 돈까스. 하지만 남자 친구를 끌고 들어온 여성들은 메뉴판을 보는 즐거움을 안다.

천국김밥, 치즈김밥, 참치김밥, 참치마요김밥, 새우날치알김밥, 돈까스김밥, 킹소세지김밥, 직화소불고기김밥, 제육불고기김밥, 새우튀김김밥. 김치스팸김밥, 멸치김밥, 게살김밥…. 라면, 떡라면, 치즈라면, 해물잠뽕라면, 만두라면, 떡만두라면, 쫄면, 칼국수, 수제비, 김치만두, 고기만두, 갈비만두, 떡볶이, 라볶이, 치즈떡볶이, 치즈라볶이, 어묵탕, 유부우동, 한우사골만두국, 한우사골떡국, 모듬튀김을 건너 식사류. 스팸김치볶음밥, 치즈스팸김치볶음밥, 햄야채볶음밥, 직화낙지덮밥, 직화주꾸미덮밥, 불고기낙지덮밥, 돌솥비빔밥, 비빔밥, 오므라이스, 치즈오므라이스, 뚝배기불고기, 생등심돈까스, 순두부찌개, 김치찌개, 된장찌개, 육개장, 부대찌개, 공깃밥. 그리고 계절메뉴. 물냉면, 비빔냉면, 냉모밀. 그리고 상대적 부자들의 세트메뉴. 돈까스+라면, 치즈돈까스+오므라이스+콜라.

2019년 드라마〈멜로가 체질〉의 명대사, “메뉴판을 보는 즐거움을 아는 남자라면 참 괜찮다.”고. 젊은 여성들은 60개가 넘는 메뉴에서 각각의 맛을 분별해 음식의 개별성을 확보한다. 뱃살을 염려하며 글루텐이 가득한 탄수화물과 밥 사이에서 끝없이 망설이다 분식집에서 그런 고민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맛있게 먹으면 살 안 찐다.”는 남자 친구의 넉살에 그저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라볶이와 김밥, 돈까스 세트를 주문하는 여성들의 천국이 또한 김밥천국이다.

가볍게, 그리고 건강하게 먹고 싶다면 단연 김밥이다. 김밥 한 줄에 거대한 보온통에서 받아 온 육수 한 그릇이면 이후에도 몸이 가볍다. “김밥은 믿음직스러워요. 재료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예상 밖의 식감이나 맛에 놀랄 일도 없습니다.” 2022년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나온 대사다.

주인 손맛을 안 타는 음식이 없다지만, 김밥이나 비빔밥만큼 예측 가능한 음식도 별로 없다. 김밥이나 비빔밥에 들어가는 야채들은 다시 가열되지 않은 채 밥과 섞인다. 어지간히 간을 못 보는 주인장이 아니고서는 우엉과 당근, 배추와 시금치, 콩나물, 달걀부침에 무슨 엄청난 맛의 편차가 있겠는가.

옆 테이블엔 먼저 온 노파의 제육덮밥을 같이 먹자고 합세한 동글동글 뽀얀 노파. 제 음식을 나눠 먹자는 친구의 반죽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겠으나 수저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다. “이 집 제육덮밥이 그렇게 맛있다며, 양도 많고. 오늘은 네가 사지만 낼은 내가 살꼬마.” 동무라서 숭하지 않아 보인다. 안 본 척할 테니 맛있게 잡수세요.

나는 순두부찌개다. 뜨거운 음식인 데다 가격도 저렴하다(6천원). 비록 고깃덩어리는 안 들어가지만 계란이 둥둥 뜨고 바지락까지 골고루 들어가 먹을 맛이 난다. 덤으로 이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콩나물국. 짠 것을 싫어하는 내게 딱이다. 천국이 별건가. 이 세상 마음 편히 앉아 즐길 수 있다면 그곳도 천국이다. 퇴직하니 도처가 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