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 인문학광장#16 홀로 바둑을 두며
시정 인문학광장#16 홀로 바둑을 두며
  • 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 승인 2023.06.29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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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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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 바둑에는 급수가 있다. 9급부터 시작하여 한 급씩 올라가며 5급이면 남들한테 “바둑 좀 둡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다. 3급 정도면 1급인 사람과 두 점만 접고 두면 되니까 누구와도 대국할 수 있는 꽤 잘 두는 편에 속한다.

웬만한 직장에는 ‘기우회’ 같은 바둑 동호인 모임이 있어 매년 두서너 번쯤의 대국 시합이 있다. 휴일 아침부터 기원에 모여 급수별로 상급, 중급, 하급으로 나누어 대진표를 짜고 토너먼트로 진행한다.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점검해 볼 수 있고 자신의 급수를 상대적으로 평가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서 모두 진지한 모습으로 대국에 임한다. 대국 시간을 프로 기사들처럼 체크할 수 없으니까 자칫 장고파 상대를 만나면 승부를 겨루는데 한 시간을 훌쩍 넘기는 건 다반사이다.

패자부활전도 있어서 결승전에라도 오르려면 점심을 배달 자장면으로 때우고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혼전을 치르고서 해 질 녘에야 부상으로 바둑판이나 바둑알을 받아 들게 된다. 얼핏 보면 두뇌 싸움 같지만, 체력과 인내심의 대결이라 볼 수도 있으니, 단순한 취미나 잡기를 넘어선 그 무엇이 내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우승과 준우승을 하면 한 급이 올라가는데 대부분 처음 급수를 신청할 때 실제 급수보다 한두 급 정도 낮추므로 보통은 짠 급수들이라서 자신의 수준을 가늠해 보기가 쉽지는 않다. 어릴 때 집에 바둑판이 있었다. 바둑돌을 담는 용기는 나무를 깎아 만든 것으로 모양새가 그럴 싸 했는데 정작 바둑알은 영 볼품없는 것이었다.

검은 돌은 어느 바닷가 몽돌밭에서 주워온 건지 납작한 게 매끈거리는 감촉은 좋고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바둑판에 놓을 때 내는 둔탁한 소리도 듣기가 괜찮았다. 하지만 하얀 돌은 조개껍데기를 갈아서 엄지손톱 크기 정도로 만든 것인데 크기도 고르지 않거니와 너무 얇아서 바둑판 위에 둘 때 톡톡거리는 것이 착석하는 손맛을 경감시켜 버린다.

4학년 때 아버지가 처음으로 바둑 두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선이 가로세로 19줄씩 그어져 서로 만나는 교차점이 361개이다. 두 명이 마주 앉아 번갈아 두는 거니까 한 사람이 180번 이내로 둘 수 있겠다. 사각형의 바둑판에 각자의 돌로 경계선을 만들어 집을 짓고 지어놓은 집의 수가 많으면 이기는 것이다.

사이좋게 반씩 나누어 살면 좋으련만 집 수가 홀수이니 누군가는 한 집이 모자라서 질 수밖에 없다. 너 죽고 나 사는 게 시합이니까 한 집이라도 더 지으려면 부지런히 울타리를 치거나, 상대편 담장을 침범해 치열한 접전을 벌여서 무너뜨릴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정된 땅덩어리를 한 평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아옹다옹 다투고 바동거리며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바둑과 흡사하다. 바둑은 먼저 말뚝 박는 사람이 유리하니까 하급자나 나이 어린 사람이 흑을 잡고 먼저 둔다. 세상살이도 먼저 태어난 연장자가 기득권을 가지고 이미 많은 땅을 차지하고 있어 유리하다.

불리한 후발 주자는 밤낮없이 청춘을 다 바쳐 열심히 일하며 한 뼘씩 땅을 불려 나갈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자칫 다급한 마음에 무모한 반칙을 범하다가는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시간 종료 전에 시합장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바둑 두는 것이 직업인 프로 기사들의 대국에서는 먼저 두는 사람이 다섯 집 반 정도의 덤을 핸디캡으로 가지고 집 수에서 공제하게 된다. 선착의 유리함을 상쇄하고 비기는 경우도 방지하는 묘책인데 예전엔 네 집 반이던 것이 최근에는 여섯 집 반까지 늘어난 대국전도 있다.

그만큼 먼저 시작하는 사람이 훨씬 유리하다는 분석이리라. 인생에서 선착자인 선배의 덤은 핸디캡이 아니라 인센티브로 주어져 있으니 바둑 시합과는 정반대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한 수만 물리면 안 될까요?” 사활이 걸린 전투를 서로가 가진 계략을 총동원해서 치르다가 병사의 포석이 잘못됐다고 다시 두겠다는 염치없는 소리다.

한번 둔 돌은 거둘 수 없다는 ‘일수불퇴’의 기본 룰도 모르느냐며 고집하다가도, 한두 번은 웃으며 물려주는 것이 지인들 사이의 대국에서는 흔한 인심이다. 행여 지더라도 새로 한 판 더 두어서 자웅을 겨루면 되니까 다음 판 전투에서 승리하면 되리라는 기대감에서 우러난 여유로운 심리의 소치일 것이다.

그러나 한 번뿐인 인생에서는 당 키나 한 말인가? 웬만큼 수양하고 무소유의 철학 나부랭이에 심취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림 반 푼도 없는 소리다. “내가 죽어 줄 테니 너나, 잘 사세요.” 할 사람이 어디에 있기나 하겠는가 말이다. 하물며 친 인척간, 형제간, 심지어 부모와 자식 간에도 재산 문제로 다툼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요즘의 세태에서야!

학창 시절에 6급이었는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조금 늘어서 3급이나 될까 싶다. 수십 년이라고 해도 대국을 한 것은 서너 배도 안 될 것이고 바둑책을 보고 혼자서 묘수풀이를 하거나 바둑 채널을 통해 조금씩 향상된 결과일 뿐이니까.

몇 년 전만 해도 초등학교 때 기원에 다녀서 급수가 확실한 아들놈과 몇 달에 한 번쯤은 대국을 즐겼다. 처음엔 내가 흑을 쥐고도 졌는데 아들이 직장생활을 시작한 몇 년 뒤부터 바뀌어서 백을 쥐고도 이기는 횟수가 많아졌다.

내가 실력이 늘어서라기보다는 아들이 바둑판 대국이 아닌, 실제 인생살이 대국장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느라 한가한 신선놀음에 빠질 여유가 없어서 일게다. 회사 다니며 객지에서 자취생활 하다가 어쩌다 휴일에 집에 들러 아침 늦잠을 즐기는 아들에게 “바둑 한판 둘래?” 하는 말도 선뜻 꺼내기가 망설여진다.

요즘엔 괜찮은 바둑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해서 컴퓨터로 혼자서 대국을 즐긴다. 6급부터 5단까지 분류되어 상대와 자기 급수를 선택할 수 있고, 덤과 접바둑도 정할 수 있어 잘 설계된 프로그램 같다. 두다가 중간 계가도 물으면 답해주고, 컴퓨터는 2초도 안 되어 다음 수를 착점하는데, 내가 한참 동안 다른 볼일 보고와도 묵묵히 기다려 주는 것이 제일 마음에 든다.

잘못 두어 물려 달라고 하면 몇 수라도 물려주고 영 불리하다 싶어 새 판을 요구하면 얼마든지 응해준다. 가끔 웃기는 일도 생긴다. 내가 유리하다 싶어 신나게 두고 있는데 화면에 갑자기 영문 글자가 떠서 깜박거린다.

“당신이 이겼습니다. 동의하십니까?” 하는 문자를 보고는 컴퓨터의 돌을 던지는 항복 선언에 불계승의 통쾌감까지 맛보게 된다. 40년 가까운 사회생활도 접고 친구들과의 교우도 소원해져 집안에 박혀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가 과묵한 친구 하나 생긴 셈인데 벌써 1년이 되어간다.

세상에 태어나 가족과 친인척 외에 친구와 동료, 지인을 만들고 안면을 넓히며 살다가, 다시 한 명씩 멀어져 가고 결국엔 혼자가 되는 게 인생사가 아니던가.

별다른 탈 없이 만나고 헤어지기만 해도 그나마 다행한 친분이고 감사한 일일 테고!

한마디 말도 없이 눈으로 바둑알만 쳐다보다가 마우스를 클릭하는 손짓만으로 대화를 나누는 컴퓨터이지만 어느새 수십 년을 함께한 친구들보다 지금은 내게 더 필요하고 친근한 벗이 되어 버렸다. 컴퓨터를 끄고 고개를 들면, 그래도 친구들이 그리워지는 건 무슨 미련스러운 심사이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