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 인문학광장#20 매미 공원
시정 인문학광장#20 매미 공원
  • 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 승인 2023.07.13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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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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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 “할아버지 왜 차 안 타고 걸어가요?” 무덥던 여름도 다 지났지만 건조하긴 해도 아직은 따사로운 초가을 햇살을 받으며 손녀가 찡그린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내년에 입학하는 손녀가 근 석 달 만에 놀러 와서 점심을 마친 한가한 시간에 다가오는 생일 선물이나 사줄까 하고 단둘이 나섰다.

“으응, 기름이 떨어져서. 가까운 곳이니까 소화도 할 겸 살살 걸어서 가자.”

“네, 할아버지. 빨리 가요!” 사실은 둘째 놈 결혼이 내년 봄으로 잡혀서 궁리하던 중에 지금은 별반 몰고 다닐 일도 없고 하여 처분한 지가 꽤 오래되었다.

생물인 인간은 물을 먹고 살고, 무생물인 자동차는 기름을 먹고 움직이고. 아무리 잘난 사람도 물 없으면 죽고, 고급 승용차도 기름 떨어지면 멈추고. 생물도 무생물도 아닌 기업체는, 돈 없으면 문 닫고. 돈을 먹고 살아가는 기업체? 아닌데, 돈을 만들어 내는 기업체라야 맞지!

부실한 기업은 돈을 축내며 지탱하고 건실한 기업은 돈을 만들어서 사람까지 먹여 살리고. 돈맛을 본 인간은 밋밋한 물맛을 버리고. 밋밋한 물은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물! 순수함을 버려야만 돈의 단맛을 알 수 있는 건가?

원자량 1인 수소 두 개와 16인 산소 한 개로 구성된 H2O, 물! 생명의 근원이고 우리가 사는 지구가 푸른 별로 불리는 이유인 물도 92개의 자연 원소 중에 달랑 두 개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분자식 C2H5OH인 술을 마시면 수소가 여섯 개나 있어 수소 풍선처럼 간덩이가 부어올라 안하무인이 되고, 산소가 하나밖에 없어서 숨을 헐떡거리다가 일산화탄소 CO에 중독되어 골 때리게 된다던가?

3대 영양소인 탄수화물이 C6H12O6이니까 밥 대신 분자식이 비슷한 술만 먹어도 활동에 필요한 칼로리는 섭취되지 않겠나? 살 빼려고 애써 운동할 필요도 없어 좋겠네. 도랑 치고 가재 잡고.

“할아버지, 뭐 살 거예요?”

“으응, 가서 보고. 뭐 살만한 게 있으려나?” 대기업 부장으로 근무했고 얼떨결에 제조업을 차려 십수 년간 여러 명 먹여 살리느라고 온갖 고생 하다가 그마저 본의 아니게 문을 닫고, 환갑이 훌쩍 지난 나이에 빠듯한 연금 생활하는 내 주머니 속사정을 모르는 손녀는 신바람이 나서 내 손을 잡아끌며 보챈다.

두 해 전만 해도 내외가 오붓이 사는 집에 모처럼 올 때면, 놀다간 며칠도 되지 않아서 재롱떨던 손녀가 보고 싶다던 아내 생각에, 그러면 자주 올까 봐 포도랑 매화 그림이 있는 ‘예쁜 돈’을 주곤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 선뜻 결행할 엄두를 못 내고 망설이는 처지이다. 도로변 공원 숲길을 타박타박 걸어가는데 철 늦은 매미가 힘겨운 울음을 운다.

“매앰, 매애앰. 매~앰.”

“야, 매미다~! 할아버지 매미는 왜 울어요?”

“으응? 음. 그게, 친구야 놀~자 하고 노래 부르는 거야.” 매미 울음은 수컷이 암컷을 부르는 세레나데이다.

참매미가 나무껍질 속에 낳은 400여 개의 알은 1년 뒤 여름에 부화해서 애벌레가 되고, 스스로 푹신한 곳으로 떨어져 땅속에 숨어든다. 풀과 나무뿌리의 즙을 빨아 먹고 댓 번의 탈피를 하며 5년쯤 살다가, 완전한 유충인 굼벵이가 되어, 천적을 피해 밤에 나무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온다.

굼벵이는 수 시간 만에 허물을 벗고 날개를 햇볕에 말려 성충이 되고, 며칠 후부터 수컷은 짝을 찾아 복부의 진동판을 떨며 울어 젖힌다. 5분 정도 울다가 자리를 옮겨가며 7일 내지 길어야 한 달 동안 우는 수컷과, 벙어리인 암컷은 공기로 전달되는 수컷 울음소리의 진동을 따라가, 겨우 30% 정도의 짝짓기에 성공한다. 이렇게 번식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매미는, 길고도 짧은 생을 마감하고, 몇 개의 구성 원소로 환원되어 자연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하, 우는 게 아니고 친구 불러요? 나는 친구 있는데.”

“그래? 우리 규리는 친구가 많은가 보네! 허허.” 어릴 적 소나기가 지나간 여름 밤하늘에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이 장관을 이루어 친구들과 함께 부르던 ‘푸른 하늘 은하수’도 우리의 태양 같은 항성인 별들이 수천억 개 정도 모인 건데, ‘빅뱅’ 이후 138억 년을 빛의 속도로 팽창한 우주 전체에는 우리 은하계 같은 다른 은하계가 수천억 개 더 있어서 이 우주의 별의 숫자는 지구에 있는 모래알 숫자와 같단다.

“모래알같이 많은 사람들, 하필 이~면 왜 당신이었나? 싫어서~도 아니고...” 좋은 시절에 고운 사람 만나 그럭저럭 살다가 후손 남겼으면 된 거지, 100평의 땅을 더 가지면 무엇하고 10년을 더 살면 무엇하랴? 어느 날 때가 되면 친구들과 주고받던 술잔만 물려주고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육신은 홀연히 본래의 원소로 돌아가면 그만인 것을!

매미가 우는 높지 않은 나무를 올려다보니 이파리 여러 군데에 우화하고 남긴 연한 갈색의 굼벵이 허물이 잔뜩 붙어있고, 우는 매미도 손 닿을 가지에 앞발의 발톱으로 매달려있다.

나는 문득 좋은 꾀가 떠올라서 철부지 손녀를 유인한다.

“규리야 할아버지가 매미 공원 만들어 주까?”

“매미 공원요? 어떻게 만들어요?”

“으응. 저 우는 매미 잡아서 큰 반찬 통에 넣고, 저~기 봐라. 나뭇잎에 매미 껍질 많이 있제? 저것들도 꺾어서 넣자!”

“우와~ 재밌겠다. 어서 잡아요, 할아버지!”

“근데, 매미 공원 만들려면 집으로 얼른 가야 되는데? 엄마 아빠랑 갈 시간 전에 만들어야 하니까.”

“그래요, 할아버지. 얼른 잡아서 가요.”

“네 생일 선물, 안 사도 되것냐?”

“으응, 나는 매미 공원 선물이 더 좋아요.” 살며시 손을 뻗어 콱, 매미를 움켜쥐는데, 울다가 지쳤는지 쉽게 잡힌 매미는 발버둥을 치며 사력을 다해 우짖는다. “매앰, 매앰, 매애앰~”

어쩌면, 기저귀 찬 손녀가 애벌레처럼 앞으로 기어 온다는 게 자꾸만 뒤로 기어가던, 그 무렵에 태어났을지도 모를 매미다. 지구는 초속 447m로 쉼 없이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