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 인문학광장 #24 어리굴젓
시정 인문학광장 #24 어리굴젓
  • 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 승인 2023.07.27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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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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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 초인종이 울려서 내다보니 택배기사가 서 있다. 얼떨결에 묵직한 포장 물품을 받아 들었는데, 젊은 택배기사가 머뭇거린다. “사인해줄까요?” 했더니 잠시 주저하다가 그냥 가버린다. 염색을 안 한 내 머리가 너무 허옇고 이마가 벗어져, ‘이 노인네에게 주고 가도 될까?’ 싶어 망설인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나왔다.

꾸러미를 열어보니 한 살 아래 처고모가 500g들이 명란젓, 낙지 젓갈, 어리굴젓 세트를 보내왔다. 처고모가 보험설계사를 하는데, 아내가 두 아들놈 자동차 보험을 들게 해 줬더니 명절마다 답례로 부쳐오는 선물이다.

명란젓은 연한 살색으로 짜지도 않고 맛이 아주 좋아서 내 몫으로 챙기고, 나머지는 장남 내외에게 주곤 한다. 외출 중인 아내에게 문자로 알려주고 명란젓을 개봉해 한 알을 꺼내어 작은 용기에 담고, 나머지는 냉장고에 넣었다.

잠시 후 점심 먹으려 반찬을 꺼내다가 문득 며칠 전에 어디에서 읽었던 굴의 효능에 관한 기사가 떠올랐다. 이집트 여왕인 클레오파트라가 피부미용을 위해 애용했고, 18세기 희대의 호색한 카사노바가 한 끼에 열두 알씩, 매일 네 번을 먹었다는 내용이었다.

굴에는 비타민 A, B1, B2, 니아신(B3)이 들어있어 피부에 탄력을 주고, 멜라닌 색소를 분해하는 기능이 피부 미백 효과를 준다고 한다. 아연 함량이 풍부해서 테스토스테론 분비를 촉진하여 정자 생성을 활발하게 만들며, 전립선 비대증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어쩔까 망설이다가 어리굴젓도 개봉하여 몇 숟갈 퍼서 접시에 담았다. 며느리는 원래 피부가 하야니까 달리 미백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장남은 겨우 마흔 조금 넘었는데 어리굴젓 안 먹어도 별일 없을 터이니, 진갑(進甲)도 지난 노인네가 먹어 치웠다고 설마 아내가 불평이야 하겠나 싶다.

새로 지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에 어리굴젓 한 점 입에 넣어 잘근잘근 씹어본다. 예상외로 물렁거리지 않고 제법 오돌오돌한 것이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야들야들한 속살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으며 꿀꺽 넘어간다.

어리굴젓의 ‘어리’라는 말은 어리고 작다는 뜻이고, 너럭바위에 붙어사는 자연산 굴이 ‘어리 굴’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안 간월도 산이라고 하던가? 굴은 햇볕을 쬐면 생장이 중단되기 때문에, 하루에 두 번 햇볕에 노출돼 말려지고 바닷바람에 씻겨서, 3년 정도 자란 것이 크기도 2~3cm밖에 안 되며, 속살이 탄력 있고 맛이 아주 고소하다고 들었다.

간월도 ‘강굴’은 ‘물 날개’(굴의 표면에 나 있는 작은 명털)가 자잘하고 그 수가 많아 고춧가루 양념 등의 배합률을 높여 주기 때문에 독특한 맛을 낸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바다를 낀 나라에는 모두 굴이 나는데, 프랑스,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일본산이 일품이라고 한다. 중국의 담강, 주해, 청도에서도 굴이 나지만 날것으로 먹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익혀서 먹는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굴을 바다의 우유로 비유하고, 17~18세기 남성들이 비밀리에 모여서 굴 시식 의식을 가졌다고도 하며, 로마의 카이사르 황제가 생굴을 먹기 위한 목적으로 영국을 침략했다는 야사도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굴의 종류는 토굴, 태생굴, 가시굴, 참굴, 긴굴, 갓굴, 일본굴, 주름꼬마굴, 옆주름덩굴굴 등 9가지가 있다. 이 중에 ‘가시굴’은 각고(殼高)와 각장(殼長)이 3cm로 작으며, 조간대(潮間帶)의 간조선(干潮線)에 떼로 부착하여 사는데, 선사 시대 조개더미인 패총에서 나오는 굴 껍데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참굴은 각고 3cm, 각장 5cm로 담수의 영향을 받는 하구 쪽이나 조간대의 만조선(滿潮線) 부근 바위에 붙어살며, 양식하는 굴은 모두 이 참굴이다. 아들놈들과 처고모 덕분에 겨울철 보양식으로 어리굴젓을 먹기는 했는데, 이번 설날에 장남 내외에게 낙지 젓갈만 건네주게 된 아내한테서 푸념 소리를 듣지나 않을지, 어째 뒷맛이 개운치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