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 인문학광장#28 구피
시정 인문학광장#28 구피
  • 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 승인 2023.08.10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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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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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 “어? 이걸 왜 버렸지? 아직 쓸 만한 물건인데...” 나는 재활용 분리수거 백에 버려진 지름이 12센티쯤 되는 원통형 투명 플라스틱 반찬 통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내는 쓰던 물건을 좀처럼 잘 버리지 않는다. 그런데 며칠 전에 티브이에서 집안의 잡동사니를 내다 버리고 새로운 삶의 기쁨을 갖게 됐다는 프로를 보더니 이제 웬만한 물건들은 아끼지 않고 버리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나는 반찬 통이 모양도 예쁘고 손잡이도 달려있어서, 어항으로 만들어 지금 키우고 있는 구피를 몇 마리 담아 추석에 올 손녀에게 주면 아주 기뻐하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어서 깨끗이 씻어 말려두었다.

“저놈에 구피, 이제 다 내다 버려야 할까 봐요!” 여고 동창회에 다녀온 아내가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거실 티브이 옆에 놓인 어항을 바라보더니 짜증 나는 듯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구피를 왜...?” 어항을 유심히 살펴보니 여과기의 ‘레인바’에서 쏟아져야 할 가느다란 물줄기가 모두 멎어있다.

2주일마다 어항 물을 갈아주고 청소도 해야 하는데, 3주가 지나도록 방치했더니 수조 내의 부유물질로 인해 물 순환 대롱이 막혀버린 것이다. 은퇴 후에 글이나 쓴답시고 노는 주제이다 보니 오늘처럼 아내가 동창들을 만나고 오는 날이면 괜히 자격지심이 들어 신경을 곤두세우고 무슨 안 좋은 일은 없었는지 아내의 눈치부터 살피기 바쁘다.

그런데 다짜고짜 잘 기르고 있던 애완용 물고기 구피를 내다 버리자니! “물 갈아 주고 어항 청소하는 것도 지겨운데, 먹이도 새로 사야 되고...” 아마도 오늘 동창 중에 남편이 아직 사회 활동을 하는 친구를 만나고 속상해 돌아와서 집안에서 빈둥거리며 어항의 물도 제대로 갈아주지 않은 내게 간접적으로 짜증을 부리는 것이리라. 나는 얼른 양동이와 바가지, 국수 삶을 때 쓰는 그물망 국자를 챙겨서 어항으로 걸어갔다.

아내는 몇 달 전에 같은 아파트 이웃집에서 구피 20마리를 공짜로 분양받아 왔다. 마침 이사 가는 사람이 버려둔 어항이 있다며 수조에 넣을 돌멩이와 조개껍데기, 플라스틱 인조 수초까지 거저 얻어왔었다.

어항 뒤쪽은 한 자가 조금 넘는 길이었고, 반 자쯤 나온 앞면의 양쪽에서 곡면을 이루고 불룩하게 튀어나온, 제법 보기 좋은 모양새의 어항이었다. 신바람이 난 아내는 마트에서 여과기와 구피 전용 사료를 사 왔고 티스푼 하나 분량을 아침저녁 두 번 나눠서 먹였다.

산책 다니는 공원 연못에서 이름 모를 수초와 개구리 밥풀을 떠다가 어항 속에 넣어주기도 했다. 불과 3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결혼 40년 만에 처음으로 거실에 그럴싸한 수족관을 마련한 셈이다. 암수 모두 부채처럼 생긴 꼬리가 붉은색이었고, 수컷보다 큰 암컷은 송사리 색깔의 몸통이 꼬리의 두 배쯤 되며, 꼬리와 몸통 사이에 푸른색을 띤 수컷은 몸통과 꼬리 면적이 비슷했다.

우리 내외는 쉬지 않고 이리저리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들이 재미나서 매일같이 들여다보면서 배가 불룩한 암컷이 언제 새끼를 낳을지 몹시 궁금해했다. 무슨 종류이고 이름이 뭔지 알아보려고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사진으로 나온 구피만 수십 가지였다.

난태생 송사리과 어종인 구피는 남미 베네수엘라 섬 지역의 따뜻한 하천이 원산지이고, 교배 후 알 형태로 어미가 뱃속에 품고 있다가 알을 깨고 한 번에 10~30마리 정도의 새끼로 낳는다. 갓 태어난 새끼는 작고 가는 몸통에 두 눈만 동그랗게 붙어있고, 수초 사이에 숨어서 크다가 몸길이가 1센티 정도 되어야 큰놈들 사이에 끼어서 제대로 돌아다닌다.

왜냐하면, 구피는 어미의 배 속에서 태어나는 새끼들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컷들이 산란 직전의 암컷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주둥이로 새끼들을 잡아먹으려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배가 고파서도 아닌데 자기 새끼든 남의 새끼든 나오는 대로 먹어 치운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한정되고 협소한 강물 속에서 종족이 다량으로 번식되면 결국은 자기들도 먹이가 모자라서 죽게 될 거라는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몸통 색, 꼬리 색, 무늬, 꼬리 모양에 따라 명명되는 구피가 수백 종을 넘는다는 것이다.

우리 집 어항에 있는 구피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밋밋한 모양새로 그냥 “막구피”라고 불리는 종류에 속한다. 막구피는 기본 몸통 색깔에 따라 레드, 블루, 옐로, 블랙구피와 드래곤, 팬시구피 등이 있다. 이 막구피들은 원래 조상의 형질을 그대로 물려받은 종류로, 생명력이 강해서 개체 수가 많다 보니 가격도 저렴하다.

종류가 다른 막구피를 이종 교배해서 생긴 잡종은 돌연변이에 의해서 모양이나 색깔도 다양해지는데, 이것 중에서 멘델의 유전법칙에 따라 잡종강세로 살아남아 다음 세대도 같은 종류가 생산되는 것을 “고정 구피”라고 부르며 가격도 비싸다. 이름도 `블루 더블 테일`이나 `하프 문 플래티넘`처럼 고상하게 불린다.

가격이 가장 비싼 구피는 “노블구피”라고 불리는데 고정구피보다 더 진기한 모양새와 화려한 색상을 지닌다. 이것들은 수십 년간 교배시키면서 개량한 품종으로 `하프 블랙블루 리본 롱핀`이나 `알비노 레드레이스 스네이크 스킨`처럼 이름도 복잡하게 붙여진다.

이종교배에 대비되는 것이 유사 형질 간의 교배 즉, 동종교배인데 이러한 근친교배를 오랫동안 지속하면 열성유전자의 발현이 강해져서 기형이나 열성 개체가 생산된다고 한다. 몽골의 우량한 말을 제주도에 사육하여 조랑말로 퇴화한 것이나, 하천 생태계를 교란하던 황소개구리의 자연적 감소가 그 좋은 사례이다. 동성동본의 결혼이 금지되는 이유도 이 동종교배 퇴화의 법칙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에, 수천 년 동안 세계를 떠돌며 다양한 형질의 민족과 얽히고설킨 유대민족은 순수 유대인보다 폴란드계 유대인, 독일계 유대인 하는 식으로 전형적인 잡종강세를 보인다고 한다. 어쩌면 기업이나 정치권의 정당들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남의 좋은 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내 것만 고집하면서 폐쇄적인 자세를 취한다면 겉보기에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열성으로 가득 차서 결코 강한 조직은 되지 못할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가 강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가 아닐까?

“여보, 옥구공원에 산책하러 안 갈래요?” 땀을 뻘뻘 흘리며 어항 청소를 다 마친 나는 말려두었던 플라스틱 반찬 통을 들고나와 아내에게 물었다. “웬일이래요? 같이 가자고 할 때는 안 간다더니!” 실내복 차림의 아내는 버렸던 반찬 통을 자랑스럽게 흔드는 내 꼴을 보고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응, 여기에 수초랑 개구리 밥풀 담아 와서 어항을 만들까 해서. 추석 때 우리 규리 오면 구피 몇 마리 분양해서 주려고!”

“아, 그래요?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얼른 갑시다!” 아내는 안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푸른색 막구피를 몇 마리 사다가 함께 넣어주면 잡종강세에 의한 신품종이 탄생하겠지,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